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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감기에 걸린 날

구운 치즈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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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새벽에 내리는 비였다. 가까스로 청한 어설픈 잠을 새벽의 빗소리가 매정하게 흔들어 깨웠다. 축 처진 몸을 일으키고 손을 뻗어 라디오를 켰다. 이 빗소리에 슬픈 장단이라도 맞추듯 우울과 청승을 완벽하게 겸비한 음악들이 디제이의 멘트도 없이 줄줄이 흘렀다. 순간 마음이 흐물흐물 댔고 침대 아래 밀어 둔 노트북을 켜고 쓰다 만 유서 같은 일기를 이어갔다.


이렇게 특별한 원인도 이유도 없이 나는‘마음의 감기’에 덜컥 걸렸고 며칠 째 방구석을 뒹굴며 처량하고 슬픈 바이러스를 키워갔다. 그냥 끝도 없이 고독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하루 종일 어둑어둑한 이 방에 영원히 갇힌 듯한 서늘한 공포가 밀려들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서글퍼졌다. 고독과 외로움은 분명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 경계는 무너지고 있었다. 요즘 따라 쉽게 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내 처지가 갈 곳을 잃은 여행자처럼 쓸쓸해 보였다. 다들 별 탈 없이 잘도 사는 데 나만 힘들게 버티며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이제는 그만 하고도 남을 쓸데없는 생각을 또 꺼냈다. 스스로에게 끝없이 던지는 대답 없는 질문들은 유리 같은 내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자꾸 약속을 미루는 내가 슬슬 걱정된 지인들은 나의 전화 밖 손사래를 뒤로 하고 119 구조대처럼 갑작스레 집으로 처 들어왔다. 토요일 오후, 커튼을 뚫고 들어온 희뿌연 햇빛 아래에 퉁퉁 부은 얼굴로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며, 그녀들은 생각보다 나의 상태가 양호한 듯 빙긋 웃었다. 그리고 어쩌면 내 감기의 약이 될지 모르는 붉은 마법이 당긴 와인 병을 들어 보였다. 어느새 자그마한 내 주방에서 지글지글 고소한 치즈 굽는 냄새가 났다. 며칠 동안 커피만 홀짝이던 나를 위한 소박한 만찬이 지인들의 손에 뚝딱 완성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내 감기의 이유를 묻지 않았다. 걱정된다’‘보고 싶었다’’괜찮은 거지?’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나는 그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그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녹아내린 구운 치즈 조각을 올리브 오일로 버무려 낸 문어 덩어리와 함께 오물오물 씹으며, 나를 감싸 안 듯 내 주위를 옹기종기 둘러싸고 있는 익숙한 그 얼굴들을 가만히 훔쳐봤다. 어쩌면 그들은 바쁜 일을 뒤로하고 며칠 전에 한 약속을 미루고 일주일의 고단함을 참으며, 나에게 달려왔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를 위해 준비한 날처럼 가볍게 웃고 넘길 일상의 이야기들로 방안을 가득 채우며 내가 어서 마음의 감기를 떨쳐 내기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고마워서, 너무 따뜻해서,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잊을 수 없는 지인들의 우정이 구워 낸 치즈 한 접시 - 바보처럼 훌쩍이지 말고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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