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우정 사이

비빔국수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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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는 기억 속에서 까마득히 사라진 학력고사의 마지막 세대다. 선지원 후시험. 미리 원하는 대학을 지원하고, 그 대학에서 지금의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학력고사를 보고 점수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었다. 지금과는 달리 그때의 우리에겐 가고 싶은 대학의 합격을 위해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질 뿐이었다.


어린 시절, 어른들이 꿈을 크게 가지라는 말은 우리에겐 좋은 대학을 가라는 말고 다르지 않았고, 우리를 위한 밝은 미래란 좋은 대학을 합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되고 싶은 게 무엇인지는, 그저 대학을 합격한 후부터 고민해야 할 일이고, 대학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거나 결정되는 것처럼 여겨졌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나는 학과 따위는, 전공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고, 무조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실패 없이 한 번에 - 재수생이라는 이름표를 달지 않고 - 성공적으로 진학하고 싶었다.


고삼 시절, 나는 틈틈이 서점으로 가 작년 입시에서의 각 학교별 경쟁률을 분석한 전화번호부 같은 책들을 뒤적이며, 내가 안정적으로 혹은 최소의 위험부담으로 합격할만한 대학과 학과를 추렸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 없는 독문학과에 지원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작년 경쟁률이 문과대에서 가장 낮았다. 그리고 독후감 숙제를 위해 억지로 읽었던 ‘데미안’과‘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나쁘지 않았고,‘이히 리베 디히 (Ich libe dich)’같은 남성미 넘치는 로맨틱한 발음의 독일어들이 은근 매력적이었다. 4년이라는 시간을, 인생에서 학문을 위해 자신을 마음껏 불태워도 좋은 그때를 위해 나는, 독일어라곤 한마디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오로지 합격이라는 아주 단순한 이유 하나로 독문학을 선택한 거였다.


입학과 동시에 나의 고난은 시작되었다. 독일어에 대한 기초가 전혀 없는 나는 강의시간마다 볼펜을 쥔 손이 끈적해질 만큼 긴장해야 했고, 독일 교수님과 진행되는 독회화 실습은 악몽 같았다. 매시간마다 공부 못하는 열등생의 서글픔을 가슴 깊숙이 새기며, 강의실 문을 나오는 순간부터 벌써 다음 시간이 두려워졌다. 이런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건 한 학년 위의 선배 들었다. 나와 같이 기초가 바닥인 신입생들을 위해 일주일에 한두 번씩 스터디 그룹을 마련해주었다. 학교를 가는 것이 슬슬 두려워질 만큼 절박했던 나는 이 스터디 그룹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스터디 그룹의 리더였던 선배는 그런 나를 위해 자주 시간을 내어주었고, 도서관에서 독문법 시험을 앞두고 혼자 시름하는 나에게 슬쩍 자신만의 비밀노트를 건네기도 했다. 선배 덕분에 나는 조금씩 전공수업에 적응해나갔고, 언제든지 궁금한 게 있으면 가르쳐줄 든든한 과외선생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났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고 가을이 오자, 그 선배와 나는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아도 어색하지 않은 편안한 선후배 사이가 되었다. 제법 큰 키에 세련된 스타일의 선배는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고, 어디서든 먹히는 멀끔한 비주얼 탓에,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는 소개팅을 하느라 바빴다. 선배는 소개팅에서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났을 때면 어김없이 도서관에 있는 나를 불러내, 캔 커피를 건네며 앞으로 사귀게 될지도 모르는 그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사귀게 된 그녀와 헤어졌을 때도 강의실에서 나오는 나를 슬픈 눈으로 멈춰 세우고, 학교 앞 맥주집에서 자신의 이별을 털어놓으며 나에게 하소연을 했다. 그렇게 나는 얼굴도 본적 없는 수많은 선배의 그녀들과의 만남 혹은 이별의 순간을 함께 했다. 학사장교 출신인 선배는 3년을 나와 같이 대학생활을 하고 졸업과 동시에 군대에 입대를 했다. 제대 후 선배는 대기업에 입사를 했고, 아직도 학교에 다니는 내 동기들에게 전화번호를 알아내 나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토요일 오후, 약속 장소에서 나를 기다리는 반듯한 양복을 입은 선배의 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맛있는 점심을 사주겠다는 선배에게 나는 오랜만에 자주 가던 학교 앞 분식집의 비빔국수가 먹고 싶다고 졸랐다. 시험 때면 선배는 도서관에서 예상문제를 뽑아주고, 늦은 점심으로 내가 좋아하는 비빔국수를 사주며, 만점을 받으면 자신의 덕분이라며 밉지 않은 생색을 내곤 했다. 선배는 간단한 안부를 시작으로 나의 직장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예전처럼 조잘대는 나를 빤히 보다가, 선배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넌 참 눈치가 없다. 내가 그렇게 기회를 줬는데도, 한 번을 눈치 못 채는 거 보면… ”나는 선배의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나를 향해 선배는 “늘 네가 있었잖아. 내 연애의 시작도 끝도. 네가 날 붙잡기만 하면 됐는데. 그걸 모르고 한 번을 안 잡더라.”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순간, 대학시절의 과외선생님 같던 그때의 선배가 아닌, 멋지고 근사한 한 남자로 보이는 그를 애써 외면하며 나는 말했다. “무슨 소리야. 퍼지기 전에 국수나 먹어.”각자의 앞에 놓인 비빔국수를 묵묵히 비비다가 어색하지만 그러나 따뜻하게 서로의 눈이 몇 번 마주쳤다. 오랫동안 사랑과 우정으로 비비고 얽힌 우리의 사이를 닮은 비빔국수 – 잠깐이었지만, 아주 달라 보였던 그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며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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