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베리코 하몽
나는 창문을 타고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날이면 이상하게도 차가운 샤르도네 한잔이 생각났다. 투명한 서리를 머금은 유리잔 속의 샤르도네가 마치 달콤하고 상큼한 향이 나는 빗방울 같았다. 게다가 누군가 소곤거리는 듯한 빗소리에 맞춰 내 마음을 두드리는 노래 한 곡이 우연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면, 나의 샤르도네를 향한 집착은 차츰차츰 볼륨을 높이게 된다. 즉, 마시지 않고는 못 배기는 상태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이런 순간에, 아껴두었던 샤르도네 한 병이 냉장고 속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면,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절로 걸리고 만다. 이제, 이것을 비와 음악에 흠뻑 취해 느긋하게 혼자 비울 것인가 아니면 보통의 오늘을 살고 있는 그 누구를 흔들어 함께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 순간 문뜩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며칠 전 스페인으로 해외 출장을 다녀오면서 빳빳하게 다린 티셔츠 속에 이베리코 하몽을 한 장씩 넣어 가져왔다고 자랑을 했던 지인이 생각났다. 오후 5시를 갓 넘긴 시간… 그는 아마도 이 근처 어딘가에서 작업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다.‘비 오는 날엔 샤르도네’라는 문자를 보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답이 즉각 왔다. 나는 모두가 외근을 나간 텅 빈 사무실에 소박한 술상을 차렸다. 근처 마트에서 산 향긋한 멜론을 먹기 좋게 토막을 내어 하얀 접시에 담고 목이 기다란 와인 잔도 꺼내 놓았다. 잠시 후에 하몽이 담긴 쇼핑백을 흔들며 그가 도착했고, 때마침 외근을 나간 후배들도 하나 둘 잇따라 돌아왔다. 이들은 어린 나이에 겁 없이 팀을 맡아 한없이 부족했던 나를 도와주던 고마운 스텝들이었다. 어렵고 불편한 갑과 을로 만나 쉽고 가벼운 날보다 어렵고 힘든 날들을 더 많이 함께 보냈다. 그리고 이제는 나의 소중한 지인이 되어 마음을 나누고 힘을 모으고 서로를 응원하는 사이가 되었다.
내가 냉장고 속에서 알맞게 차가워진 샤르도네를 꺼내고 모두의 잔을 채우자 누군가는 어울리는 음악을 골랐다. 그리고 오늘의 비를 위해, 오늘도 무탈한 모두를 위해 건배를 하고 샤르도네 한 모금을 넘겼다. 나는 몰랑몰랑 잘 익은 멜론 조각을 얇은 선홍색 젤리 같은 이베리코 하몽에 말아 입안에 넣고 씹었다. 멜론의 달달한 맛과 하몽의 짭조름한 맛이 어우러져 ‘단짠’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입안을 즐겁게 했다. 창 밖의 빗줄기는 어느새 퍼렇게 멍들어 가는 하늘 속에서 더 굵어졌고 우리는 눈을 지그시 감고 말없이 음악을 듣다가 비워진 서로의 잔을 눈치껏 채워주었다. 아무런 대화가 없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침묵이 빗소리와 음악을 타고 흐르는 이 순간이, 우리를 긴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조급했던 마음을 잠시 쉬게 하는 노곤한 단잠 같았다. 그러고 보면 ‘지극히 하찮은 혹은 시시한 데서부터 사랑이 시작된다’는 하루키의 소설 속 문장처럼, 행복이라는 것 또한 행복하려고 애쓰지 않을 때, 그저 익숙한 사람들과 보내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한 순간에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비와 최고의 마리아쥬를 만들어낸 샤르도네 그리고 이베리코 하몽– 천천히 음미하며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