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 국밥
나는 가을이 아니라 봄을 탔다. 해마다 봄이 오면… 딱히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온 신경을 간지럽힐 듯 쏟아지는 봄 햇살에 몸과 마음이 뭉클해지는 순간들이 반복됐다. 그러다 출근길의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워지고 말수가 줄어들고 밤이면 맥락 없는 옛 추억들을 끝없이 꺼내며 잠을 설쳤다. 그것도 모자라‘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그 길’ 앞에 우두커니 멈춰 서서 결말이 뻔한 소설 같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밤새 베개를 끌어안고 꺼이꺼이 울고 마는 이상한 행동들을 보이기도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런 증상이 한층 더 심각해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사건 사고가 줄줄이 터졌다. 그간 무탈하던 광고주의 불만이 갑작스럽게 한꺼번에 폭발해 아침부터 이사님에게 모두 불려 가 혼쭐이 나고, 일주일 뒤에나 예정된 프레젠테이션이 내일모레로 앞당겨진 것도 모자라 어제까지 멀쩡하던 노트북이 돌연 먹통이 되어 지금까지 준비한 것들을 전부 날리고 말았다. 밤새 혼자 떤 청승 덕분에 머리는 돌덩이처럼 무거웠고 퉁퉁 부어 보름달 같은 얼굴은 나조차도 처다 보기 싫었다. 여전히 널뛰는 감정을 진정시키지 못한 나는 광고주 앞에서 불만 가득한 표정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말았고, 그 덕에 더욱 분노한 그들은 당장 새로운 대안을 내놓으라고 노발대발이었다. 선배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겨우 그들의 진노를 가라앉히고 모두 회의실에 모여 대안을 준비했다.
노트북이 없는 나는 연신 하얀 보드에 뾰족함이 사라진 공허한 생각의 조각들을 잔뜩 써 내려갔다. 반나절을 꼬박 회의실에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해결책은 그들에게 백 퍼센트 만족을 주지 못했고 내일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오라는 불호령을 끝으로 일단락되었다. 게다가 내일모레로 당겨진 프레젠테이션은 가닥도 잡지 못한 채 소위 맨땅에 헤딩을 반복하며 모두를 답답함 속에서 숨죽이게 했다. 그 순간 누구가 속이 뻥 뚫리는 제안을 했다. 이렇게는 안될 듯 하니 각자가 고민할 시간을 갖고 두 시간 후에 다시 모이자고 했다.
회의실에서 해방된 나는 잠깐 찬바람이라도 쐴 요량으로 사무실을 나왔다. 한참 물이 오른 눈부시게 투명한 봄날의 햇살 속을 걸으며 어질어질 해진 나는 느닷없이 엄청난 허기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도 배가 고픈 나에게 짜증이 났다. 짜증이 나면 날수록 이상하게도 급속도로 배가 고파졌고 나는 무작정 눈에 보이는 첫 번째 식당으로 들어갔다. 소박한 시골집의 부엌을 떠올리게 하는 전주식 콩나물 국밥 집이었다. 이 식당의 유일한 메뉴인 콩나물 국밥을 주문하고 찬물 한 컵을 따라 마시자 보글보글 세차게 끓어오르는 뜨거운 콩나물 국밥이 내 앞에 놓였다. 함께 나온 수란에 국물 몇 숟가락을 넣고 김 가루를 뿌리고 휘휘 저어 한입에 훌훌 털어 먹었다. 푸딩처럼 부드러운 계란이 목구멍으로 미끄러지듯 넘어갔고, 그런 나를 힐끔거리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까지 나를 사정없이 몰아세우던 그분들이었다. 우리와 함께 대충 때운 점심 탓에 이른 저녁을 먹는 듯했다. 나는 숨겨놓은 과자라도 훔쳐먹다 들킨 꼬마처럼 머쓱해져서 다급히 어색한 목례를 하고, 한 손에 숟가락을 움켜 쥔 채 어쩔 줄 몰라했다.
식사를 끝낸 그분들이 사라진 후 나는 그저 창피한 마음에 몇 술 뜨지도 못한 콩나물 국밥을 속죄하듯 묵묵히 내려다봤다.‘하아~ 배는 왜 고파져서… 게다가 하필 여길 들어와서… 저분들을 만날 건 뭐람?’씁쓸한 후회가 몰려오는 순간, 또 뱃속은 꼬르륵 소리를 내며 요동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가 고팠던 어느 봄날의 콩나물 국밥 - 바보처럼 주린 배를 원망 말고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