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너무 좋아하는

by anego emi


도쿄 유학 시절, 자신에게 특별했던 혹은 좋았던 향기를 그림으로 표현해보라는 과제를 받은 적 있다.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어려운데 향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라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모두 뭘 그려야 할지 몰라 서로를 힐끔거리며 연필을 만지작거렸다. 선생님의 의도는 향기에 얽힌 각자의 기억에 남는 이야기나 느낌, 그날의 분위기를 그려보라는 거였다. 나는 어린 시절 5월의 초저녁 바람을 타고 하늘에서 내 머리 위로 쏟아졌던 아카시아 꽃잎을 떠올렸다.


나고야 출신인 내 옆자리의 18살 유꼬는 유달리 수박을 좋아했다. 신기하게도 유꼬의 작품에는 언제나 수박이 등장했다. 입학하고 첫 일러스트 실습 시간에 선생님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걸 그리라고 했다. 그녀는 반으로 쪼개진 커다란 수박과 그 옆에서 만화책을 보는 자신을 그렸다. 그 후로도 어떤 과제가 주어져도 유꼬의 수박은 때로는 뜬금없이 때로는 혀를 내두를 만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 정도면 수박을 좋아해도 너무 좋아하는 게 틀림없었다.


이번 과제에서 유꼬의 수박은 과연 어떻게 등장할까?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수박은 향기로 유혹되는 과일이 아니었고, 선생님은 분명 그 향기의 주체를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그리면 안 된다고 했다.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그림으로 표현하여 보는 사람들이 ‘아하, 이건 수박 향기구나’ 유추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유독 이 과제가 어려웠다.


그런데 유꼬는 또 한 번 놀라운 아이디어를 냈다. 나는 그녀 다운 깜찍한 발상으로 탄생한 그림을 보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번 그림에는 결코 수박이 등장할 수 없겠구나 하는 나의 기대를, 유꼬는 멋지게 한방에 날려버렸다.


4층짜리 맨션의 맨 꼭대기 층에 있는 작은 베란다. 그곳에서 녹색 원피스의 소녀가 까치발을 한 채, 빨간색 아이스크림을 깨물며 저 멀리 보이는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있었다. 소녀의 오물거리는 입 모양과 까만 하늘을 수놓은 수박씨 같은 불꽃의 파편에서 순간 상큼한 수박 향기가 났다. 유꼬의 사랑스러운 수박은 이번에는 아이스크림과 불꽃으로 둔갑했다. 좋아하는 것. 너무 좋아하는 것. 거기에는 자신과의 남다른 교감, 그 이상의 이야기들이 녹아 있었다.


회사를 떠나 마흔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좋아하는 것을 위해 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내 그림에는 유꼬가 표현해내는 순수함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잘하려 애쓰는 노력의 흔적과 애타는 간절함이 배어 있을 뿐이었다. 유꼬처럼 좋아하는 것을 진심으로 즐기기보다, 좋아하니까 더 잘해야 하고, 그것이 소위 실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다시 유코처럼 되는 일은 기적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피카소가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위해 했던 그 오랜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러나, 도란도란 나란히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서로의 그림을 바라보는 그 순간만은 나 또한 유꼬를 조금이라도 닮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 tip

No ( ). No Life. 괄호 속에 넣고 싶은 것을 떠올려본다. 떠올렸다면 그것을 더 좋아한다. 그러다 보면 그것만 있다면 혹은 그것만 하면서 살아도 행복할지도 모른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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