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다음 생에

by anego emi



은행 비가 내리던 어느 가을날, 한 학기를 같이 보내며 허물없이 친해진 동기들과 엠티를 갔다. 무슨 조화인지 우리 과는 문과대임에도 불구하고 남학생 수가 공대생 수준으로 많았고, 덕분에 나는 입학과 동시에 팔자에도 없던 공주 대접을 받았다. 매너 좋은 남자 동기들은 서울이 낯선 나를 위해 학교생활의 많은 부분을 배려해줬고, 우렁 각시처럼 알뜰살뜰 보살펴줬다.


우리는 강촌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각자 챙겨 온 간식들을 나눠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마른오징어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고슬고슬 잘 구운 오징어를 젓가락 크기로 찢어서 내게 건네며, 그 당시 나의 보디가드를 자청했던 그가 말했다. “우리 중에 가장 먼저 결혼하는 사람은 누굴까? 투표 한번 해볼까? 나중에 결혼할 때 냉장고 사주기 어때?” 모두 재미있는 아이디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스프링 노트 몇 장을 4등분으로 접어 찢은 후 한 조각씩 나눠가지고 각자 생각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서 투표함을 대신한 그의 야구 모자에 담았다. 결과는, 내가 압승이었다. 두 표를 제외하고 모두 내 이름이었다. 나는 한참 소개팅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과대표의 이름을 썼으니까, 나를 포함한 다른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다 내 이름을 쓴 거였다. 그 순간, 나는 새침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닐지도!”


결과는, 아니었다. 광고 회사에 입사하면서, 나는 결혼이라는 걸 가끔 상상하게 했던 남자 친구와 길거리 한복판에서 매정하게 헤어졌고, 그 후로 3층짜리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듯한 숨 가쁘고 짧은 연애를 몇 번씩이나 했지만, 남자 친구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상대를 찾지 못했다. 3층짜리 계단을 한 번 올라가는 동안 뜨거웠던 내 마음은 서서히 식기 시작했고, 내려가는 동안 어김없이 상대의 단점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차라리 이 시간에 부족한 잠이나 더 자자 하는 고약한 생각까지 들곤 했다.


그래도 그때는 누군가 ‘결혼은 안 하세요?’라고 물으면, 입술을 실룩거리며 나는 말했다. “아직 때가 아닌가 봐요. 짝을 못 만났어요.” 그러다가 밀레니엄을 코앞에 두고 ‘올해 싱글인 사람은 죽을 때까지 영원히 싱글’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예언이 흉흉하게 떠돌던 그때, 누군가 내게 또 놀리듯 물었다. “결혼은 안 하세요?” 나는 짜증 섞인 퉁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빠서 못 했어요.”


그리고 이제 중년으로 성큼 큰 걸음을 내디딘 내게, 간 큰 누군가가 또 겁 없이 묻는다. “결혼은 안 하세요?”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결혼은, 다음 생에 하려고요.”


어느 순간부터 부모님과 친척들은 빼먹으면 서운한 안부처럼 물어대던 결혼 이야기를, 더 이상 내게 꺼내지 않는다. 유독 최근 들어서 주변의 ‘엄친딸’들이 그 어려운 결혼이라는 인륜대사를 거창하게 치르고도 사건 사고가 많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사랑하는지 생각해보기 위해서 가던 길을 멈춰 섰다면, 그때는 이미 그 사람을 더 이상은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한다. 내게 결혼은 그런 것이다. 딱히 그 사람을 그 순간에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함께 가다가도 자꾸 멈춰 서고 말았던 것. 사람이 변할까? 그러니 결혼은 다음 생의 깜짝 이벤트로 꼭꼭 숨겨두기로 했다.



# tip

결혼은 안 해도 그만이지만, 같이 늙어갈 친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가능하면, 가까운 곳에 서로 둥지를 틀고 살면 더욱 좋다. 그런 친구를 둘셋만 챙겨 놓자.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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