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음을 깨우는 묘약

믹스 커피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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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겨울용으로 선보일 새 양복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에 온 나는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몇 번이나 있는 힘껏 눈을 치켜떠도 무거운 눈꺼풀에 눌려 스르르 자동으로 감겼다. 30대 초반… 아무리 한창 일할 펄펄한 나이라고 하지만, 몇 달째 계속되는 야근과 이틀에 한번 꼴로 시퍼런 새벽하늘에 해가 뜨는 걸 보며 잠이 든다면, 누군들 지치지 않을까?


오늘따라 광고주는 그들의 당연한 권리인 듯 모델이 허락한 시간 안에 불가능한 것들을 요구했고, 소위 빅 스타인 모델은 해야 할 일이 차츰 늘어날수록 찬바람을 날리며 인상을 구겼다. 나는 모든 게 내 탓인 양 눈치를 살피며 각자의 사정을 설명하고, 가까스로 타협점을 찾아 서둘러 촬영을 진행했다. 그러다 모델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 나는 머리를 앞으로 꼬꾸라뜨린 채 깜빡 졸다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지곤 했다. 먹물 같은 블랙커피를 몇 잔이나 마셨는데도 잠에 취한 듯 희미하고 몽롱한 머리와 피곤에 절은 몸은 여전히 휘청거리며 허우적댔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고, 나는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구석에 놓인 소파에 몸을 구부리고 쪽 잠을 잤다. 그리고 꿈속에서도 나는 또 분주했다. 나는 광고주가 산더미처럼 건네준 새 양복들을 들여다보며 무어라고 떠들어 대며 정신없이 스튜디오를 누비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누군가 애타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깼다.


나를 잠에서 깨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 스튜디오의 주인이자 포토그래퍼 인 실장님이었다. 뽀얀 얼굴에 선명하고 시원시원한 눈매를 가진 실장님은 실력보다 의욕이 앞선 나를 늘 토닥거리며 언제나 내가 놓친 많은 것들을 침착하게 챙겨주었다. 실장님은 쑥스러운 듯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 나에게 믹스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내밀었다. 그리고 누가 들을 새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졸음을 물리치는 묘약 이야. 믹스 커피에 위스키 반잔… 일단 마셔봐. 그러면 몇 시간은 거뜬해.”나는 실장님이 건넨 커피를 가만히 내려보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달짝지근한 커피 맛 뒤에 톡 쏘는 위스키 향이 강렬했다. 그리고 온몸에 뜨거운 알코올 기운이 찌릿하게 퍼지며 순간 정신이 또렷해졌고, 왠지 몸도 기분도 아까보다 훨씬 가벼워지고 에너지가 쏟는 듯했다.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실장님을 향해 엄지를 척하고 들었다.


술기운 탓인지 커피의 단맛 탓인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이 묘약 덕분에 실장님의 말대로 한결 쌩쌩해진 몸과 멀쩡한 정신으로 촬영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모델과 광고주가 돌아가고 최종 확인과 정리를 위한 마무리 회의까지 전부 끝내고,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스튜디오 밖을 나왔다. 갑자기 긴장이 풀린 탓인지 기지개를 활짝 켜며 올려다본 검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이 핑그르르 돌며 순간 어질어질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이 몽롱해지며 폭풍 같은 피로와 졸음이 몰아쳤다. 이 묘약의 유효기간은 여기까지였다. 팽팽했던 긴장이 풀리면 그 효력은 사라지고 마는 거였다. 그때 마치 내 졸음을 흔들어 깨우는 알람시계처럼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퇴근 전에 잠시 회사에 오라는 선배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감쪽같이 졸음을 확 깨우던 그 묘약이 한잔 더 필요한 순간인가? 그런데 이 묘약은 하루엔 한잔만 마셔야 한다고 아까 실장님이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졸음을 깨우는 묘약 같은 믹스 커피- 홀짝홀짝 아껴가며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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