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다리를 위한 치유

랍스터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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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산티아고의 순례길을 다녀온 후배가 있었다. 그녀가 가끔 보내주는 노을 지는 들판 길과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마을의 사진들을 보면서 나도 그곳을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는 잘 안다. 이제 나에게는 아니 지금 상태의 나에게는 절대 무리라는 걸… 언제부터인가 오래 걸으면 발목이 아팠다. 신기하게 처음엔 오른쪽 발목이 아프다가 무릎이 아프고 그리고 왼쪽 발목과 무릎으로 옮겨갔다. 이 증상을 심각하게 처음으로 느낀 건, 극심한 슬럼프에 빠진 나를 구해내기 위해 떠난 뉴욕 여행에서였다.


나에게 뉴욕이란 별다른 추억이 없어도 좋은 솔메이트와 같은 곳이다. 세계 어딜 가도 나는 뉴욕보다 나은 점을 찾으려고 본능적으로 감성과 이성을 총동원 하지만, 언제나 승자는 뉴욕이었다. 나는 도착한 첫날부터 무리한 스케줄을 감행했다. 머릿속에 숨겨두었던 비밀의 지도를 꺼내고 다운타운부터 업타운까지 하루 종일 걸으면서 내가 숨겨놓은 보물 같은 곳들을 찾아내고 싶었다. 아울러 시차 덕에 시달리는 불면의 밤을 피곤으로 무거워진 몸으로 사정없이 눌러버릴 생각이었다. 나는 걷고 또 걸었고 어느덧 어둑어둑 해진 하늘을 무대로 화려하게 기지개를 켜는 브로드웨이를 지나 노란 가로등 불이 자꾸만 발걸음을 재촉하게 만드는 뮤지엄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근처의 와인 샵에서 추천 와인 한 병과 치즈를 사고 숙소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오늘 다시 찾아낸 나의 보물들을 흐뭇하게 떠올리며 와인 한잔을 마시고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다.


다음날 늦잠을 자고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숙소를 나온 나는 전철역으로 빠른 발걸음을 옮기다가 오른쪽 발목에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강한 통증을 느꼈다. 근처 벤치에 앉아 잠시 동안 두 손으로 발목을 꼭꼭 주무르고 일어섰지만 통증은 계속되었다. 결국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편의점으로 가 커피값보다 더 비싼 파스를 사서 발목을 감싸도록 덕지덕지 붙이고 미리 티켓을 사놓은 미술관으로 향했다. 늘 붐비는 미술관이 오늘따라 웬일인지 한산했다. 이 참에 빠짐없이 둘러보며 꼼꼼하게 작품 감상을 할 요량으로 오디오 가이드도 신청하고 가방도 보관소에 맡기고 홀가분한 몸으로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잠깐 괜찮아지는 듯했던 오른쪽 발목이 다시 욱신욱신 강도를 높여가며 쑤셔왔다. 작품 설명을 듣기 위해 서 있는 그 짧은 순간에도 식은땀이 날 만큼 발목의 통증으로 고통스러웠고, 수시로 전시관 한가운데 놓인 딱딱한 소파에 앉아 발목을 만지작거려야만 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더 이상의 관람을 포기하고 이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얼빠진 얼굴로 고민했다.


여행의 시작은 언제나 실망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숙소로 돌아가긴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순간, 뉴욕에 오면 꼭 먹고 싶었던 랍스터가 떠올랐다. - 나란 인간은 이런 좌절의 순간에 스스로에게 가장 특별한 걸 먹여주고 싶어 진다. - 나는 첼시마켓으로 가 랍스터와 맥주를 마시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먹어 치울 완벽한 플랜을 짜고 아픈 다리를 끌고 지하철을 탔다. 첼시 마켓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랍스터 가게로 직진하고 주문을 했다. 이곳은 해산물을 파는 다양한 가게들이 들어찬 푸드 코트 인지라 별도의 좌석이 없었다. 다들 허리까지 오는 동그란 테이블에 서서 음식을 먹어야 했다. 드디어 랍스터가 나오고 친절한 종업원이 맥주 캔을 따서 플라스틱 컵에 가득 따라주었다. 나는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뜨거운 랍스터의 집게 다리를 뚝 잘라 버터를 녹인 노란 레몬 소스에 찍어 먹었다. 폭신폭신 쫄깃한 속살과 향긋한 버터 향이 입안 가득 퍼지자 다리의 통증도 감쪽같이 사라지는 듯했다. 랍스터를 향한 나의 식탐이 순간 통증을 잊게 한 걸까? 그리고 차가운 맥주 덕분인지 오른쪽 다리에 꾹 하고 힘을 주어도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깐의 착각이었다. 잠시 후 도저히 서있을 수 없을 정도로 오른쪽 다리가 휘어질 듯 휘청거리며 발목이 아팠다. 아픈 다리를 위한 특별한 치유가 되길 바랬던 랍스터 – 통증 따위는 조금만 더 참으면서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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