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서 문자가 왔다. 곧 마이너스 통장의 계약 기간이 끝나가니 연장을 원한다면 필요한 서류를 다시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나보다 100배쯤 요리조리 영리한 후배는 혹시 목돈이 필요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퇴사하기 전에 마이너스 통장 하나쯤은 반드시 만들어 놓으라고 충고했다. 줄곧 나의 월급을 포함한 자잘한 금융 업무를 담당했던 모 은행은 대출 흔적이 없는 나의 신용 등급과 연봉을 감안하여, 제법 큰 금액의 돈에 낮은 이자율을 붙여 내 통장으로 입금해줬다.
퇴사 후 별로 돈 쓸 일이 없었던 나는 그 돈을 고스란히 통장 속에 묵혀 뒀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도쿄 유학을 결정하게 되었고, 이제야말로 이 돈을 쓸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하필 그때 은행의 매정한 문자를 받은 것이다. 퇴직금 덕분에 이 돈을 갚고도 충분한 돈이 다른 통장에 남아 있었지만, 은행은 남의 회사든 자신의 회사든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않은 나의 처지를 다시 한번 냉정하게 언급하며 대출금을 되찾아갔다. 원래 내 돈도 아니었지만 은행을 나오면서 마치 돈을 어이없이 강탈당한 듯한 허탈감이 밀려왔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나의 처지를 ‘돈’이라는 가장 현실적이고 치사한 방법으로, 이 사회가 각인시키는 듯해 서글픈 기분마저 들었다. 게다가 오늘도 눈치 없이 쑥쑥 오르는 엔화를 보며 나의 복 없는 팔자를 한탄했다.
햇살이 제법 뜨거운 오후의 거리를 한 뼘쯤 축 처진 어깨로 휘청거리며 걷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이게 뭐라고. 어떤 설득과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 굳은 결심과 의지가 한순간에 약해질 만큼, 이게 대단한 일인가? 당장 쓸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깟 마이너스 통장이 만기 된 것뿐인데, 괜스레 소심 해지는 내가 한심했다.
이런 유형의 걱정과 불안은 앞으로의 일을 도모하는 데 수시로 장애물이 될 게 뻔했다. 모아놓은 돈은 언젠가 바닥날 것이며, 틈틈이 프리랜서 신분으로 일을 받아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내게, 금전적인 문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장애물이었다. 지금까지 월급에서 자동으로 해결되던 4대 보험을 이제 스스로 챙겨야 하고, 수입에 따른 세금을 직접 관리해야 했다.
무엇보다 의료보험이 제일 부담되었다. 지금까지 월급에서 매달 엄청난 금액을 보험료로 꼬박꼬박 상납했다는 점과 지금까지 내가 낸 돈을 감안하여, 조금이라도 깎아줬으면 하는 나의 바람은 헛헛한 무지에 불가했다. 다행히 아직까지 큰 수입원이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의료보험료 조정을 위한 신청 서류를 작성하고, 무표정한 공단 직원에게 몇 번씩이나 잘 부탁드린다는 사정에 가까운 말을 하고 돌아섰다. 그래 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지금의 내 처지에 맞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나를 지켜내지 못하는 자존심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제, 회사라는 틀을 깨고 나온 내가 알아야 할 것들을 차근차근 알아가야만 했다. 그것들을 더 이상 귀찮아하거나 비굴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었다. 회사에 속했던 내가 나와 다른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 냈던 그 많은 세금을, 이제 처지가 달라진 나를 위해 하나둘씩 찾아서 누리면 그만이라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 했다. 그건 어쩌면 생존을 위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도 하다.
# tip
아는 것이 힘이다. 부지런히 세금 관련해서 공무원들에게 질문하고 해결책을 알려달라고 조르면, 그 금액은 의외로 줄어든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껏 낸 세금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도록 꾸준히 관심을 갖는다. 스스로 챙기지 않으면 안 된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