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니기리와 캔커피
도쿄에 살려면 지진이라는 녀석에게 반드시 익숙해져야 한다. 새벽녘에 집이 흔들린다. 이게 꿈인가 하고 놀래서 뒤척이다 텔레비전을 켜면 지진이 났다는 뉴스가 나온다. 처음에는 너무 무섭고 당황스러웠지만 습관처럼 반복되는 땅의 흔들림과 함께‘또 지진이구나’하고 무감각해진다. 그때부터 여행자가 아닌 진짜 도쿄에 사는 사람이 되어가는지도 모르겠다.
일본 도호쿠 대지진이 나던 날… 나는 롯폰기에 있는 쯔타야라는 큰 북스토어에 있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보고 싶은 책들을 잔뜩 쌓아놓고 주문한 커피를 마시며 책을 펼쳤다. 잠시 후 쌓아놓은 책들이 조금씩 흔들렸다.‘아 지진이구나. 뭐 늘 있는 일이지’하고 생각하는 순간‘지진입니다. 지진입니다’라는 다급한 안내방송이 흐르고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홍보용으로 천장에 매달아 놓은 판촉물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리고 지진으로 인해 일찍 문을 닫게 되었으니 다들 돌아가 달라는 안내방송이 흘렀다. 나는 순간 짜증이 났다. 큰 맘먹고 나온 외출인데 잊어버릴만하면 오는 단골손님 같은 지진 때문에 벌써 돌아가야 한다니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이 지진이 몰고 온 무시무시한 사태와 엄청난 피해를 실감하지 못했다. 투덜대며 다른 서점을 가도 근처 카페를 가도 문은 굳게 잠긴 채 오늘 휴업이라고 쓴 네모 판이 매정하게 매달려 있었다.
결국 나는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자제품을 파는 가게 앞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있었다. 모두 쇼윈도의 텔레비전을 보는 것 같았다. 궁금해진 나는 사람들 틈 속에서 까치발을 하고 텔레비전을 봤다. 화면 속의 거대한 쓰나미가 휩쓸고 간 참혹한 풍경과 곳곳에 무너진 건물과 집들이 심상치가 않았다.‘아하… 그냥 지진이 아니라 대단한 일이 생겼구나.’ 그제서야 서둘러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하철도 덴샤도 이미 멈췄고 역무원들과 경찰관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사람들에게 알리느라 분주했다. 모두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하철역 내에 쪼그리고 앉아 책을 보거나 핸드폰을 뒤적였다. 30분이나 지났는데 지하철의 개찰구는 여전히 닫혀 있었고 조급해진 나는 신주쿠로 갈 다른 방법은 없는지 역무원에게 물었다. 그러자 버스를 타고 시부야로 가서 걸어가야 한다고 했다. 차가운 날씨 속에서 두 시간이 넘게 기다려 버스를 탔지만 버스는 꽉 막힌 도로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슬슬 짜증의 소리가 날 만도 한데 신기하게도 버스에는 서늘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움직이지도 않는 답답한 버스에서 내려 걷기로 했다.
벌써 해가 지고 어두워진 밖은 한겨울처럼 추웠고 그날따라 바람은 더 매서웠다. 그런데 주위를 보니 길거리의 사람들은 마치 한밤의 소풍이라도 가듯 삼삼오오 시시콜콜한 잡담을 해가며 걸어가고 있었다. 경찰들은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교통정리를 하거나 길안내에 열심이었다. 길치 인 나는 친절한 일본 여인을 따라 시부야까지 함께 걷기로 했다. 걸어가는 사람들의 손에는 모두 편의점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그 속에는 소풍날 엄마가 싸주는 김밥처럼 편의점에선 산 오니기리와 캔 커피가 담겨있었다. 걷다 보면 허기 가지니까 그때를 위해서 준비한 거였다. 나도 근처 편의점에서 딱 하나 남은 명란 오니기리를 운 좋게 손에 쥐고 자판기에서 따뜻한 캔 커피도 샀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행렬 속에 끼여 터벅터벅 걸었다.
서슬 퍼런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달이 유난히 밝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밤 10시가 넘어갔다.‘오늘 중에 집으로 갈 수 있을까?’ 크게 한숨을 내쉬는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신주쿠에서 근무하는 일본 친구였다. 괜찮냐고 놀라지 않았냐고 안부를 묻고 본인은 오늘 집에 가기는 무리인 거 같아 근처에서 술을 마신다고 했다. 혹시 너도 집에 가기 힘들면 이곳으로 와 같이 술이나 마시자고 했다. 역시 그렇다. 그들에겐 그저 지진은 일상에 불과했다. 나는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고 비닐 속의 오니기리를 꺼내 들었다. 조심스럽게 비닐을 벗기고 한입 물었다. 차갑게 식어 얼어붙은 밥알이 푸석푸석 씹혔다. 미지근한 캔 커피를 따서 한 모금 삼켰다. 점점 걸음이 느려지는 내가 걱정되는지 친절한 일본 여인은 자주 뒤돌아 봤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환하게 웃으며 그녀 뒤를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서늘한 한밤의 소풍 같았던 그날, 엄마의 김밥은 아니지만 든든하게 내 허기를 채워주었던 오니기리와 캔 커피 – 그들처럼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