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살, 도쿄 취업 도전기

by anego emi



맥북이 먹통이다. 자정을 넘기고 막 드라마 <심야식당>이 시작될 무렵, 무심코 휘두른 내 오른쪽 팔꿈치에 걸려 넘어진 머그잔은, 사정없이 맥북의 까만 키보드 위로 샛노란 주스를 토해냈다. 깜짝 놀란 나는 수건으로 급히 주스를 닦아냈지만, 이미 키보드 사이사이로 스며든 끈적한 주스는 맥북의 신경을 마비시키고, 한순간에 맥북을 잠들게 했다.


졸업 작품 마감을 일주일 남겨놓고 발생한 사태였다. 사색이 된 나는 한참 넋을 놓고 있다가 다행히 외장하드에 데이터들을 백업해 놓았다는 사실이 떠올라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음 날, 긴자의 애플 스토어를 찾았지만 ‘소생 불가’라는 진단을 받았다. 나의 애처로운 이 사연을 접한 일러스트 실습 담당 선생님은, 흔쾌히 자신의 최신 맥북을 내게 빌려주며 힘내라고 했다. 선생님의 맥북은 속도가 빠른 건 기본이고, 가장 최신 버전의 정품 소프트웨어들은 감탄을 자아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나의 졸업 작품은 나와 비슷한 또래(40대) 선생님들의 열렬한 지지에 힘입어 장려상을 수상했다. 그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 마련해주는 전시회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졌고, 1학년 후배들 앞에서 졸업 작품 준비 과정을 설명하며 스무 살 청춘들의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원 없이 받았다.


그 후 출석률과 학점이 증명해준 성실성과 졸업 작품으로 검증된 재능을 인정한 취업 담당자는, 나의 취업을 위해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도쿄에서 취업할 생각이 없었다. 무엇보다 도쿄에서 더 이상 살 자신이 없었다. 좁고 답답한 집도, 서늘한 겨울도, 숨 막히게 더운 여름도 모두 힘겨웠다. 담임선생님과 취업 담당자는 도쿄에서 취업을 하는 게 새로운 경험과 기회가 될 거라고 재차 강조하며, 내게 이력서를 쓰게 했다.


도쿄의 전문학교 취업담당자는 이력서부터 포트폴리오까지 모든 걸 코디해준다. 일본 기업도 신입사원의 나이 제한이 있어서 취업 담당자는 한국에서의 내 경력을 검토하고, 중간 관리자로서 일할 수 있는 중소기업들을 선별해줬다. 그중 대부분이 광고회사였다. 나는 도쿄까지 와서 한국에서 하던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고, 무조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회사였으면 좋겠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며칠 후, 취업 담당자는 내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로 어느 게임회사의 면접을 따냈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장은, 다짜고짜 학교에서 수없이 봐왔던 정체불명의 캐릭터가 스케치된 종이들을 펼쳐 보이며, 이들에게 부여하고 싶은 세계관을 설명해보라고 했다. 이런 그림 따위에 무슨 세계관씩이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떤 의도로 그려진 것인지 그 과정을 알 수 없으니, 나는 그것에 대해 할 말이 없다고. 그것으로 면접은 끝이었다. 갑자기 긴장의 끈을 놓아버린 듯한 그의 얼굴은 더 이상 내게 궁금한 게 없어 보였다. 그는 슬그머니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당신의 경력과 당신의 시도가 대단해 보였어요. 그래서 우리 회사의 철없는 디자이너들의 매니저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당신은 당신의 그림이 그리고 싶은 거군요.” 그와 어색한 악수를 나누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그래, 한국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내 그림을 그리자.



# tip

일본의 전문학교를 졸업하면 누구나 일본에서 취업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중소기업들의 경제활동이 활발한 일본은 적극적으로 포트폴리오를 내면 가능성이 더 커진다. 그리고 수많은 공모전에 당선되면 더 수월해진다. 참고로 영어와 중국어 둘 중에 하나가 가능하면 더욱 유리하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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