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갇힌 시간

by anego emi



회사와 연을 완전히 끊었다는 내 소식을 들은 절친이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며 깜짝 선물을 보내줬다. ( 대학 동기이자 20대를 함께 보낸 A 또한 수차례 퇴사를 결심했으나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다는 이유로 퇴사를 포기했다.)


사방이 투명한 테이프에 꽁꽁 묵힌 상자를 날카로운 칼로 결을 따라 조심스럽게 긋고 두근두근 희망의 날개를 펼치듯 활짝 열었다. 화장품 파우치보다 조금 큰 사이즈에 블루투스 기능까지 갖춘 흰색의 라디오였다. 함께 동봉된 손 편지에는 ‘이제 집구석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질 테니 사람 소리가 그리워질 때 이 라디오를 켜라. 그리고 또 하나의 친구라고 생각하고 짧은 대화도 하고 세상 사는 이야기도 들어라’ 하고 검정 볼펜으로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A 특유의 냉소적인 말투가 활자의 탈을 쓰고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했다. 나는 푸-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알았을까? 센스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정확히 그랬다. 회사를 떠난 후 하루 종일 집에서 보내는 날이 많아졌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창밖이 깜깜해졌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납득할 만한 이유를 달아 설명하고 또 설명하고 결국 상대방이 고개를 끄덕여야 마무리되는 일들로 오랫동안 월급을 받아온 내게는 이 침묵이 낯설고 놀라운 일이었다.


처음엔 소리라고는 내가 만드는 기척이 전부인 것이 너무나 삭막해서 텔레비전을 온종일 틀어놓았다. 채널이 100개가 넘어도 과거를 반복하는 한낮의 텔레비전은 전혀 도움되지 않았다. 게다가 틈만 나면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보험 광고와 대출 광고는 조용한 극장 안에서 눈치 없이 떠들어대는 아이들보다 더 짜증이 났다. 딱 3일 만에 나의 시끄러운 바보상자는 다시 눈을 감고 침묵했다.


골라놓은 책을 읽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노트 위에 끄적이고, 간간히 지인들로부터 날아오는 노란 박스 속의 안부 인사에 손가락을 게으르게 움직이고 나면 나의 공간에는 싸늘한 적막이 흐른다. 그러다 보면, 문득 내가 이곳에 혼자 갇힌 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이제는 친구가 보내준 라디오 덕분에 나는 이 적막과 침묵을 깨줄 새 친구가 생긴 셈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제 나와 함께 눈을 뜰 시간이라고 잠을 깨우듯이 라디오 버튼을 툭 하고 눌렀다. 막 눈을 뜬 라디오가 기지개를 쭉 켜고 기분 좋은 하품처럼 토해내는 신나는 음악에 맞춰 커피를 내렸다. 그리고 나는 ‘흠… 오늘 아침 첫 선곡이 좋은데?’ 하고 말을 건넸다. 기다렸다는 듯이 라디오의 리액션은 다음 곡으로 이어지고, 커피 잔을 꼭 쥔 내게 기분 좋은 허밍을 선사했다. 그래, 라디오 친구. 우리 오늘부터 1일이다. 잘 사귀어보자.



# tip

라디오와 자신만의 대화법을 찾는다. 아침에는 클래식이나 영화 OST를 들으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점심에는 신명 나는 수다를 유발하는 최신 가요, 저녁에는 음악 캠프나 추억의 팝을 들으며 오늘을 차분히 읊조려본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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