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을 지우다

by anego emi



달라도 어쩜 그렇게 다를 수 있을까? 부모님의 유전자를 똑같이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언니와 나는 얼굴이 전혀 딴판이다. 거울 앞에 나란히 서서 우리가 피를 나눈 자매임을 증명하기 위해 구석구석 뜯어가며 살펴봐도 닮은 구석이 별로 없다. 내가 이렇게 억울해하는 이유는 뻔하지 않은가. 이목구비가 또렷한 타고난 미인인 언니에 비해 나는 한없이 밋밋한, 어쩌면 의술의 힘이 더해져야 예쁘다는 말을 겨우 들을까 말까 하는 정도이다.


대학생이 된 나는 외모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 화장에 열을 올렸다. 그림 그리라고 미대에 보냈더니 그림을 캔버스에 안 그리고 얼굴에만 그린다는 친구 오빠의 농담에 맞장구라도 치듯이, 나는 다양한 방법으로 내 얼굴을 변신시켰다.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탁월한 감각을 가진 언니의 화장법을 곁눈질로 훔쳐보곤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내 주변에는 세련된 화장의 달인들이 넘쳐났다.


퇴사하기 전까지 나는 한 번도 맨 얼굴로 누군가를 만난 적이 없었다. 아주 친한 여자 친구들도 간단한 기초화장을 하고 만났다. 그런데 회사를 다니지 않으면서 화장을 하지 않는 날이 늘어가자 20년을 꿋꿋하게 유지해온 ‘외출 전 화장’이라는 美의 의식이 한없이 귀찮아졌다. 코르셋을 벗어던지고 날아갈 듯한 편안함을 알아버린 나머지 다시는 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리라.


주말 오후, 마음먹고 백화점에 갔다. 대폭 세일 중인 와인 매장을 가기 위해서였다. 집을 나서기 전에 거울을 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직도 빠지지 않은 아침의 붓기로 눈꺼풀이 볼록해진 눈은 더 작아 보였고, 홍조가 도는 뺨 위로 기미가 떡 하니 눈에 들어왔다. 파운데이션을 꺼내 들었지만, 바로 내려놓았다. 그냥 안경을 쓰면 대충 가려질 것이고, 토요일 오후 백화점에서 내가 지인들을 만난 확률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초등학교 시절의 첫사랑을 우연히 만나는 것과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토록 공들여 ‘덧바르고 그렸던’ 화장을 말끔히 벗어던진 내 얼굴을 누가 알아볼까? 그냥 모르고 지나갈 것이 분명하다. 나는 선크림만 대충 찍어 바르고 집을 나왔다.


지하 식품관에 들어서자마자 와인 매장으로 거침없이 직진하고, 입구에 놓인 나무 상자에 쌓인 와인들을 뒤적이는 그때, 막 계산을 끝내고 나오는 한 남자가 나를 보며 반가운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환하게 웃었다. 코끝에 걸린 안경을 위로 치켜올리며, 나를 향해 걸어오는 그를 힐끔 봤다. 내가 회사를 떠나기 몇 달 전 경력사원으로 입사한 기획팀 대리였다. 그는 어떻게 화장 안 한 내 얼굴을 단박에 알아본 걸까? 그는 특유의 쩌렁쩌렁하고 시원한 목소리를 자랑하며 큰 소리로 내게 안부를 물어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민망한 맨 얼굴의 나를 빤히 보며 우연한 재회를 기념하는 악수를 청했다. 나는 그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채 그에게 안부를 묻고, 그 옆에 서 있는 그의 여자 친구에게 목례를 하고, 마치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는 듯 손에 든 와인을 급히 계산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를 말리며 문득 생각했다. 그동안 그렇게 애를 쓴 화장은 생각보다 큰 차이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가 그렇게 쉽게 나를 알아본 건 아닐까?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보다는 반가움이 선명하게 묻어 있었고 ‘그 얼굴이 바로 그 얼굴’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래, 앞으로는 별 차이도 없으니 속 시원히 화장을 지우고 진짜 내 얼굴로 살자. 화장품 값도 절약되고 일석이조이지 않은가?



#tip

화장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만족할 수 있다면 안 해도 그만이다. 자신 있게 맨 얼굴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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