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았던 것들

by anego emi



지금까지 나는 바쁘지 않으면 불안했다. “바빠서 깜빡했어”, “바쁜데 어떡해” 같은 변명과 이유를 마치 훈장처럼 달고 살아야 잘 사는 것 같았다.


그런 내가 다시 학생이 되자 날마다 무더기로 쏟아지는 한가한 시간이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내 지난 세월을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곳에서 배움을 향한 열정 하나로 버티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무거웠다. 일본어 학교를 다닐 때에는 매일 넘치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미친 듯이 거리를 헤맸다. 무조건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서점에 들르고 백화점을 기웃거리고 화방과 문방구를 돌며 내가 지금 이곳에 있는 존재의 이유를 억지로라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를 바쁘게 몰아친다고 한들 단번에 이유가 찾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 내가 알아야 했던 것은 여기에 있는 존재의‘목적’이었다. 1년 후 디자인학교에 입학하면서 한가한 시간은 반으로 줄었고, 과제가 늘면서 또 반으로 줄고, 결국은 밤을 새야 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물론 일을 하면서 밤을 새우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잔뜩 물감들을 펼쳐놓고 정신없이 그림을 그리다 보면 커피 한 잔을 천천히 마신 것 같은 데 어느새 날이 밝아오곤 했다.


그렇게 또 쏜살같이 2년이 흘렀다. 디자인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에 온 후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멍만 때리는 한 달을 보내게 되었다. 내게 어떠한 죄책감도 없는 진짜 휴식을 주고 싶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창밖의 날씨부터 살피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사고, 어슬렁어슬렁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나보다 늘 아침잠이 많은 단짝 친구인 C에게 전화를 했다. 날씨가 좋으니 공원에서 산책이나 하자고 C를 조르고, 햇살이 적당히 눈부신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만개한 벚꽃들 사이로 보이는 4월의 하늘은 눈부셨다. 늘 다니던 길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살갑게 느껴졌다. 느긋하게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자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조그만 화단들이 있고, 어느새 활짝 핀 이름 모를 봄꽃들이 골목길을 알록달록 가득 채웠다. 나는 유난히 앙증맞은 진한 분홍색 꽃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때 내 옆을 지나가던 할머니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내게 말했다. “참 예쁘지요? 지금 밖에 볼 수 없는 귀한 꽃이랍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환한 미소로 답했다. 지금 밖에 볼 수 없다는 할머니의 말에 나는 괜스레 가슴이 뭉클했다.


바쁠 때는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내가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정신없이 바쁘기만 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다시 학생이 되어 보낸 시간들은 반드시 그렇게 살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해 주었다. 앞으로 그 시간들을 넉넉하게 쪼개서 내 주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는 데 쓰고 싶어 졌다. 하나하나 눈에 담고 가슴으로 다정하게 보듬어주면서 말이다.


# tip

꽃놀이, 단풍놀이, 봄가을의 소풍은 어르신들과 아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시간을 쪼개서 누려보자. 계절이 숨겨놓은 아름다운 것들을 보물찾기 하듯이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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