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아직 안 죽었구나

by anego emi



슬슬 읽고 싶었던 책 목록이 바닥났고, 날마다 커피의 풍미를 돋우던 클래식 선율이 씁쓸해졌다. 갑자기 재앙처럼 들이닥친 일상의 무료함을 극복하기 위해 당일치기 여행이라도 떠나야 하나 싶은 순간이었다.


그때 기고만장했던 차장 시절에 한 팀으로 일했던 선배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그분의 전화번호가 아직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에 사뭇 놀라며, 냉큼 전화를 받았다. 큰 광고회사 임원을 거치고 자신의 회사를 차린 선배는 그간의 오랜 인연을 맺은 광고주로부터 제법 굵직한 기회를 얻었고, 이 일을 도와줄 프리랜서들을 모으는 중이었다.


때마침 내 소식을 건너 건너 전해 들은 선배는 내게 이번 프로젝트를 같이 해보자며 제안했다. 그러나 인간은 참으로 간사했다. 그전까지 턱에 차오르던 무료함은 순간, 귀찮음으로 둔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절을 잘 못 하는 우유부단한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러겠다고 말했다.


저 멀리 가로수 길이 좁다란 골목처럼 내려다보이는 신축 빌딩의 꼭대기에 둥지를 튼 선배의 회사는 덩그러니 놓인 책상 몇 개가 전부였다. 신입사원으로 보이는 직원이 정성껏 타 준 믹스 커피를 마주하고, 전화로 못다 한 그간의 안부를 묻고, 선배가 내민 기획안에 관해 설명을 들었다. 베테랑들답게 회의는 금세 끝났고, 선배는 프리랜서가 된 이후 내 첫 수입이 될 기획료에 관해 수줍게 언급했다. 생각보다 많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회사를 막 시작한 선배에게는 충분히 부담스러운 듯했다. 그리고 후배에게 두둑한 수고비를 챙겨주지 못한 것이 미안한지, 그냥 돌아가겠다는 내게 저녁을 사주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나는 그럼 간단하게 맥주나 한잔하자 했고, 우리는 근처 호프집으로 향했다.


늦여름의 햇살이 아직 뜨거웠지만 우리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늘 그랬듯이 맥주잔을 부딪치며, 서로에게 주어진 첫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들을 두서없이 쏟아냈다. 적당한 알코올로 워밍업을 한 나의 두뇌는 그간 굳게 자물쇠를 채워놓았던 아이디어 서랍을 봉인 해제했고, 나의 입술은 묵언수행을 끝낸 수도자처럼 쉼 없이 주절댔다.


그 순간, 선배는 고슴도치처럼 삐죽삐죽 솟아오른 짧은 머리카락을 연신 만지작거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것은 예전부터 봐온, 내 이야기가 제법 그럴싸하다는 시그널이 분명했다. 그리고 맥주잔을 들어 건배를 하며 말했다. “야… 너 아직 안 죽었구나.” 순간 입안 가득 채운 맥주가 꿀꺽하고 목구멍에 걸리며 넘어갔다.


그러니까 나는… 나는 이 바닥에서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1만 명도 채 되지 않는 사람들이 뒹구는 이 바닥에서 내 이름은 이미 사라졌으니까. 말하자면, 그 수많았던 송별회는 나의 장례식이었고, 죽은 줄 알았던 내게 희망의 밧줄을 던진 것은 바로 선배가 되는 셈이었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나는 격려와 칭찬으로 내뱉은 선배의 말에, 별별 사연을 꼬리표처럼 줄줄이 달며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죽지 않았다’는 선배의 말이 빈말이 아닌 꽉 찬 말이 되도록 이번 프로젝트에 ‘적당한’ 최선을 다할 셈이다. 그 대가로 내게 일용할 책과 양식을 사다 줄 수입을 씩씩하게 챙기고, 다시 죽었다가 때가 되면 또 부활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tip

스스로에게 프리랜서임을 당당히 선언하고 본인이 직접 디자인한 명함을 만든다. 그리고 회사 OB모임은 물론, 각종 모임에 나가는 것을 꺼려하지 않으며 그곳에서 명함을 돌려본다. 이렇게 가끔씩 회사를 떠난 자신의 존재가 죽지 않았음을 은근슬쩍 각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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