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부름이든 무조건 신나게 응답해야 할 것 같은 그 시절 – 입시라는 문턱을 넘어 캠퍼스에 첫발을 디딘 우리는 꾸역꾸역 밀어 넣어 배부른 공부보다 수줍은 연애에 배고팠다. 그런 우리를 위해 쿠 피트가 화살을 쏠 준비를 마친 미팅이라는 깜짝 선물이 있었고, 우리는 까맣게 잊고 지냈던 인연들까지 모두 끌어모아 서로에게 연결시키기 바빴다.
미팅의 하이 라이 트은 다름 아닌 소개팅이었고, 그 소개팅의 단골 메뉴는 열에 아홉은 카페의 김치볶음밥이었다.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리는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귀를 간지럽히는 올드 팝이나 클래식이 흐르고, 은은한 불빛으로 한껏 분위기를 낸 테이블에서 동글 넙적한 서양식 스푼으로 얌전을 떨며 먹을 수 있고, 후식으로 커피나 소다가 따라 나왔으니까. 가을 축제를 앞두고 나는 소개팅에 열을 올렸다. 이번 축제에는 반듯이 과에서 주최하는 주점으로 나를 만나기 위해 한 무리의 친구들을 대동한 멋진 남자 친구의 등장을 현실로 이뤄내고 말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졌다.
축제일이 다가오자 마음은 조급해졌고 상대에 대한 세심한 팩트체크도 없이 금요일 저녁부터 주말까지 소개팅은 줄줄이 이어졌다. 토요일 오후, 한참 높이를 낮춘 눈과 마음에도 아직 상대를 찾지 못한 나는 선배가 주선해준 소개팅을 별 기대 없이 나갔다. 유럽의 도서관을 옮겨놓은 것 같은 카페의 문을 열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나를, 누군가 단박에 알아보고 손을 들었다. 단정하고 세련된 분위기의 남자가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수줍게 미소 짓고 있었다. 순간 심장이 쿵쾅하고 크게 뛰었다. 드디어 나도 첫눈에 마음을 흔드는 상대를 만나게 되는 걸까? 주책없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벼운 심호흡으로 진정시키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운명의 상대가 될지도 모르는 그 남자 앞에 나비처럼 차분히 내려앉았다.
이미 알고 있는 통성명이 간단하게 오가고 소개팅의 단골 메뉴인 김치볶음밥을 주문했다. 시시콜콜한 학교 이야기를 시작으로 별 뜻 없는 호구 조사와 틀에 박힌 취미에 관한 질문이 이어졌다. 잠시 후 계란 프라이가 아닌 벌집 모양으로 칼집을 낸 후랑크 소시지가 올라간 김치볶음밥이 나왔다. 지금까지 수없이 먹어온 김치볶음밥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고슬고슬 윤기가 흐르는 밥알과 새로운 토핑의 등장에 나는 꿀꺽하고 군침을 삼켰다. 아침부터 비어 있었던 내 뱃속은 음식 냄새를 즉각 감지하고 당장 채워달라고 꼬르륵 소리를 내며 앙탈을 부렸다.
그러나 나는 지금 내 시나리오 속의 멋진 남자 친구가 될지도 모르는 그 사람에게 최대한 여성스러운 조신함으로 매력도와 호감도를 높여야만 했다. 평소의 페이스보다 더 천천히 더 얌전하게 밥알을 앞뒤로 세어가며 숟가락이 아닌 스푼에 담아 눈빛의 흔들림 없이 입으로 미끄러지듯 몇 번 밀어 넣었다. 그리고 김치볶음밥을 반 이상이나 고스란히 남기고 테이블을 지나가는 종업원에게 후식으로 커피를 주문했다. 나는 커피잔을 감싸 쥐고 그가 쉬지 않고 늘어놓는 지루한 이야기들을 적당한 타이밍에 고개를 끄덕여가며 들었다. 커피 주전자를 들고 어슬렁어슬렁 카페를 순회하던 종업원이 내 커피잔을 세 번째로 채우려고 하자 그는 근처에 자주 가는 맥주 집이 있으니 괜찮으면 같이 가자고 말했다. 나는 필살기에 가까운 눈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먼저 계산서를 들고일어나 성큼성큼 카운터로 걸어갔다.
그 순간 뒤통수를 갑자기 한대 얻어맞은 듯한 헉하는 충격과 동시에 또 심장이 쿵쾅 하고 크게 뛰었다. 내 옆을 지나 걸어가는 그의 씩씩한 뒷모습이 유난히 짧았다. 모델 같은 팔등신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내 눈에 순간 포착된 그의 전신은 아무리 후하게 나눠도 오와 육을 넘지 못했다. 나와 같은 90년대 학번을 가진 여인들보다 제법 길었던 나는 – 172센티였으니까 – 일어서려다 덜썩 하고 다시 주저앉았다.
카페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그에게 그보다 큰 주먹 하나가 더 긴 여인의 뻘쭘함을 여지없이 들어내며 다가갔다. 그런 나를 보고 어깨를 꼿꼿이 세우고 먼저 앞장을 서는 그 또한 나의 범상치 않은 기럭지가 충격인 듯했다. 나와 적당한 간격을 두고 걸어가다 그는 무언가 결심을 한 듯 획하고 뒤를 돌아보며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그냥 친구처럼 편하게 맥주나 마시면 어때요?”그 웃음 속에는 그 말속에는‘당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그의 속내가 충분히 담겨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와 나란히 맥주잔을 부딪히며 나는 줄곳 남기고 온 김치볶음밥 생각을 했다. 이런 엄청난 반전으로 나를 허무하게 실망의 늪에 빠지게 할 줄 알았다면… 나의 허기진 뱃속이 그토록 갈망하던 김치볶음밥 - 스푼이 아닌 숟가락으로 푹푹 퍼서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