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차 호떡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월급날은 사라졌고 틈틈이 용돈 받는 날이 생겼다. 게으른 프리랜서인 나는 웬만하면 하기 싫은 하지 않으며, 내가 잘할 수 있는 그간의 내가 쌓은 경험치를 100퍼센트 활용함으로써 반드시 도움이 된다는 확신이 서는( 내 입장을 먼저 고려한 다분히 이기적인) 일만 받아서 고객의 만족도를 높이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남들보다 적게 일하고 덜 벌지는 모르지만( 나는 용돈이라고 생각하니까 ) 더 이상 일하는 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날마다 아침이면 쑤시고 굳어가는 내 몸을 위해 그냥 하는 가벼운 운동처럼, 내가 허락한 일을 그냥 하면 되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 단호했던 나만의 원칙을‘인정’이라는 나약한 감정 앞에 스스로 깨고 마는 경우가 생긴다. 나는 전화로 대충 들은 짧은 몇 분의 설명과 10년 기기 후배의 간절한 목소리에서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골칫덩이인지 그리고 내가‘노우’하고 말하는 순간 대안을 찾지 못한 그녀가 얼마나 절망할지를 충분히 느끼고도 남았으니까. 나도 모르게 미간에 팔자주름을 만들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한동안 받지 못한 용돈에 대한 꽤 현실적인 아쉬움과 늘 나를 넘치게 챙겨주는 고마운 그녀와의 관계를 떠올리며 나는‘예스’하고 답하고 말았다.
전화를 끓자마자 그녀에게 두둑한 자료가 첨부된 메일이 즉각 도착했고 ‘언니 고마워. 잘 부탁해’라는 문자가 왔다. 나는 순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며 한순간에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졌다. 나는 재킷을 걸치고 집을 나왔다. 이럴 땐 무작정 걸어야 한다. 걸으면서 사악한 ‘귀찮음’을 진정시켜 내쫓고 그냥 하면 된다는 ‘성실함’을 차분히 불러들여서 잠시 후 집으로 돌아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노트북을 열고 자료를 읽어 나가야 했다. 음악을 들으며 만만치 않은 빠른 스피드로 앞만 보고 걷는 나를 누군가 가로막으며 멈춰 세웠다. 깜짝 놀라는 나에게 가까운 전철역을 물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이상하게도 나에게 길을 묻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심지어 뉴욕 여행 중에도 맨해튼 한복판의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나에게 길을 물어보는 외국인이 여럿 있었다. 내가 그렇게 어느 곳에서나 대충 봐도 부담 없는 인상인가? 그러다 최근에 어떤 잡지에서 읽은 재미있는 글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비교적 자신에게 관대해 보이는 나이가 적당히 지긋한 혼자 걸어가는 여성들에게 시시콜콜한 것들 (지금의 시각, 헷갈리는 길, 가까운 전철역과 같은 )을 물어보기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들 눈에 다소 관대해 보이는 적당히 나이 든 중년의 여인일 뿐이었다.
별 것도 아닌 일에 별 것처럼 놀라운 사실을 찾아낸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묵묵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라면 누구에게 길을 물을까? 이런 쓸데없는 생각에 빠진 내 어깨를 누군가 가볍게 두드렸다. 역시 또 나에게 길을 묻는 건가? 고개를 돌리는 내게 “저 인상이 참 좋으세요. 영도 맑아 보이시고.”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수수한 차림의 여인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나는 다짜고짜 누군가에게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고 아무런 대답도 없이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까지 삼천 보가 넘는 걸음으로 애써 내려놓은 짜증 지수가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했고, 그와 반대로 폭파 직전의 신경질을 참아내느라 당 지수는 뚝뚝 떨어졌다. 그 순간 평소에 잘 먹지도 않았던 녹차 호떡이 미치도록 먹고 싶어 졌다.
나는 삼 십분 넘게 줄을 서서 기다린 후 녹차 호떡을 한 봉지 사 들고 집으로 왔다. 나는 침대 위로 재킷을 벗어던지고 아직도 뜨끈한 호떡 하나는 덥석 베어 물었다. 호떡의 끈적한 갈색의 설탕물이 입안에서 퍼지며 달달하고 쫄깃한 맛이 잠시나마 기분을 진정시키는 듯했다. 나는 노트북을 열고 까만 노트북이 눈을 뜨는 것을 빤히 보며 무심코 호떡을 크게 한입 더 베어 물었다. 익숙한 노트북의 바탕화면이 내 눈앞에 환하게 펼쳐지는 그때, 꽉 찬 눈물방울 같은 갈색의 설탕물이 뚝뚝 자판 위로 떨어졌다. 당황한 나는 물 티슈를 꺼내 급히 닦아냈지만, 결국 자판의‘ㅎ’과 ‘ㅗ’가 끈적끈적한 설탕물에 굳어 먹통이 되고 말았다.
노트북의 수리를 맡기고 돌아오는 길, 녹차 호떡 가게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서로에게 장난을 치며 호떡을 맛있게 먹는 두 명의 남학생을 빤히 보다가 나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어차피 오늘은 일을 하기에는 망친 날, 뚝뚝 떨어지는 당을 위해서 모처럼 산 녹차 호떡 – 흘러넘치는 설탕물에 조심하며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