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로 한걸음 더

오므라이스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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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하고도 둘. 난 또 한 번의 졸업을 했다. 어쩌면 생에 마지막 졸업이 될지도 모르겠다. 내 나이를 반 토막 내고도 몇 개를 더 빼야 똑같아지는,‘커피’를‘코히’라고 발음하는 낯선 일본의 청춘들과 함께 사계절을 두 번 보내고, 드디어 졸업식장에 나란히 섰다.


그들과 나의 접점은 오직 서투른 그림을 잘 그리고 싶은 간절함과 예술적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처절함... 그것뿐이었다. 하루 종일 파릇파릇한 청춘들의 징징대는 일본어와 그들의 노트북에서 흘러나오는 빅뱅의 신곡들을 들으며 그림을 그리고 과제를 했다. 서툴고 못난 나의 습작들 앞에 충격과 감격을 번갈아 먹어 가면서, 나는 조금씩 스케치북을 펴고 무언가를 그려내는 것에 용감해졌다. 그리고 졸업작품에서 나를 쏙 빼닮은 꽃을 활짝 피우고 장려상이라는 봄날의 햇살 같은 선물을 내 품속에 꼭 껴안았다.


졸업식이 끝나고 정든 청춘들과 기념사진도 찍고 선생님들의 응원과 칭찬도 두 볼이 빨게 지도록 듣고 학교에서 마련한 뒤풀이 장소로 갔다. 이제, 합법적으로 스무 살이 된 청춘들을 위해 학교는 조촐한 뷔페 식사와 맥주, 칵테일을 준비했다. 나는 친한 무리들과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오늘만큼은 모든 고민을 지워버리고 무조건 즐거워지고 싶었다. 같은 클래스의 대만 친구와 건배를 하기 위해 잔을 드는 순간, 저쪽에서 누군가 나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이런 날이면 흔히 웃는 얼굴이 기본이고 당연한 거니까, 그저 이쪽을 향해 던지는 별 뜻 없는 미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맥주를 한 모금을 마시고 옆자리 친구가 권하는 감자튀김을 우물거릴 때도, 내 어깨를 감싸며 등장한 제법 숙녀 티가 나는 나고야 출신의 그녀와 맥주잔을 부딪칠 때도, 그는 여전히 나를 보며 웃었다. 그것도 너무나 부드럽고 애틋한, 그렇게 자꾸 웃으면 곤란해질 것 같은 미소로…


연거푸 마신 맥주에 벌써 얼굴이 붉어진 대만 친구는 흔들리는 내 눈빛이 향하는 곳으로 슬쩍 고개를 돌리고 갑자기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 미소의 주인공에게 성큼 다가가 뭐라고 이야기를 하더니 그와 함께 테이블로 돌아왔다. 자신과 친한 디자인 전공의 대만 친구라고 우리에게 소개를 했다. 그는 쑥스러운 듯 가벼운 목례를 했다. 나는 조금 전까지 나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보내던 그를 향한 호기심을 수다로 누르고, 가끔씩 나에게 향하는 그의 눈빛을 외면하면서, 삼분에 일쯤 남은 맥주잔을 잡았다. 그때 불쑥 들어온 하얗고 긴 손이 내 잔을 채워주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였다. 그는 또 웃었다. 조금 전처럼 부드럽고 애틋하게…


그는 나와 가볍게 맥주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내 작품의 팬이라고. 특히 졸업작품으로 전시한 일러스트들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고. 나는 뜬금없는 고백 같은 그의 칭찬에 어색해하며 맥주 한 모금을 급하게 삼켰다. 학교의 마당발답게 여기저기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이미 거하게 취한 대만 친구는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고 그와 나, 둘만 남은 테이블로 돌아와 우리의 어깨를 감싸며 이차를 가자고 졸라댔다. 우리는 휘청거리며 앞장을 서는 대만 친구의 뒤를 따라 근처 이자카야로 향했다.


내 옆에서 제일 큰 목소리로 쉬지 않고 떠들어대던 대만 친구가 어느덧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뒤늦게 합류한 나고야 출신의 그녀가 엄마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며 밖으로 나간 사이에, 그는 나를 보며 또 웃었다. 그러다 가방에서 팬을 꺼내 들고 냅킨 위에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적으며 말했다. “내일 같이 점심 먹으면 어때요? 작품 이야기 조금 더 듣고 싶은데… 안될까요? ”적당히 취기가 오른 나는 용기를 내어 그를 빤히 보다, 그가 내민 냅킨을 손에 쥐고 내 번호를 또 다른 냅킨에 적어 그에게 내밀었다. 결국 그날, 우리는 모두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 막차를 간신히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한시를 조금 넘긴 시간, 막 잠이 드려하는데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오므라이스, 좋아해요? 시부야에 엄청 맛있는 가게가 있는데…’


다음날 늦은 점심시간, 시부야역에서 만난 우리는 바구니에 새하얀 계란이 가득 담긴 일러스트가 그려진 노란 간판의 오므라이스 전문점으로 갔다. 그는 주문을 하고 어제의 해프닝들을 잠깐 꺼내며 또 웃었다. 그리고 그는 도쿄의 풍경과 이야기를 엮은 내 일러스트 북이 출판된다면 꼭 갖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내 일러스트 북의 한 페이지를 펼칠 때마다‘진짜?’‘감사해요.’이 두 마디를 반복하며 환하게 웃었다.


폭신폭신 노란 계란 이불을 덮은 오므라이스가 우리 앞에 놓였다. 나는 오므라이스 한 숟가락을 오목한 접시에 흥건히 담긴 갈색의 소스에 살짝 담가 먹었다. 푸딩처럼 부드러운 계란과 달짝지근한 케첩과 버터 향이 나는 속 재료들이 입안에서 맛있게 섞였다.‘역시 맛집 인정’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나에게 그는 말했다. 자신은 곧 대만으로 돌아갈 예정이고 도쿄를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고. 그곳은 내가 그린 일러스트 속의 풍경과 다르지 않으니 도쿄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같이 가보면 어떻겠냐고. 정말 그랬다. 그가 가고 싶은 곳과 그곳에서 보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들은 마치 서로의 일기장을 훔쳐본 듯이 다르지 않았다.


막 만개한 벚꽃이 떨어질 무렵, 그는 나의 노트북에 한아름의 사진이 담긴 폴더를 남기고 대만으로 돌아갔다. 아득했던 도쿄에서의 추억들을 다시 기억 속에 또렷이 담아내며... 영화 같은 날들을 나에게 선물한 그와 함께 한 오므라이스 - 미련도 그리움도 남지 않도록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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