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실

by anego emi


혹시, 빨간 실에 관한 이야기 들어보신 적 있나요?

일본 드라마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아하.. 하고 눈치를 채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일본에서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인데요

인연과는 태어나기 전부터 새빨간 실로

손가락과 손가락을 묶어놓았다고 해요

그래서 언젠가는 꼭 만나게 된다는군요.

이번 생에 못 만나면 다음 생에서라도 꼭...


왜, 그런 고백들 하곤 하잖아요.

처음 만났는데, 아.. 저 사람하고

헤어지면 큰일 나겠구나

저 사람이 내 운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짓말 같기도 하지만 너무 부러운 사연이죠.

아마도, 각자의 손가락에 묶인 빨간 실들이

팽팽하게 서로를 당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아직도 운명을 못 만난 저는 어찌 된 일일까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빨간 실들이

얽히고 설키기만해서

이제 그 끝을 찾을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저는 결심했답니다. 결혼은 다음 생애)


그런데, 저에게도 참 이상한

우연히 생기기도 합니다.

도쿄 유학시절 저는 요코하마에 자주 갔었는데요

새로 생긴 요코하마 역 근처에는

엄청 큰 몰이 있고 미술관이 있어요.

그 앞에는 돔 형태의 계단식 광장이 있는데요

그 광장 한가운데서 자주 버스킹을 하거나

마술 같은 공연을 누군가 하곤 했어요.

제법 난이도가 있는 마술들을

척척해내는 것은 물론이고,

입담이며 퍼포먼스들이 거의 수준급이었죠.


날씨가 점점 더워지는 여름이면

저는 주말마다 요코하마에 가서 바다를 보고

해가 질 때까지 광장의 계단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곤 했는데요

어느 날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거예요.

무슨 일인가 했더니 꽤 인기 있는

마술 공연을 하는 날이었어요.

호기심이 발동한 저는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준비하는 과정부터 차근차근

곁눈질을 하면서 공연을 기다렸죠.


이 공연의 주인공은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인상이 서글서글한 청년이었는데요

무대 매너며 관객들의 호응을 끌어내는 것 하며

완벽했답니다. 공연에 흠뻑 반한 저는 결국,

주머니에서 거금 천 엔을 기부하고 말았죠.

그런 저에게 환하게 웃으며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는 그 얼굴이 얼마나 눈부시던지요

(천 엔... 아깝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학원제 준비를 끝내고

오랜만에 맘 편히 쉬는 주말이었죠.

뒹굴뒹굴 늦잠을 자고 멍하니 천정을 보다가

산책이나 하자 하는 생각이 들었죠.

요코하마에 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어정쩡했고

몸도 천근만근이었죠. 그래서 키치 초지에 있는

이노카시라 공원에 가기로 했죠.

정문이 아닌 중문으로 들어가서 숲을 크게 돌고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공원 정문으로 향했죠.

정문 앞에는 언제나 프리마켓이나

공연을 하는 사람들도

넘쳐났는데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죠.


저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갑자기 '저를 응원해 주세요' 하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지 뭐예요.

순간 발걸음을 나도 모르게 멈췄는데

왠지 그 목소리가 익숙한 거예요.

까치발을 하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는데

놀랍게도 요코하마의 그 청년이었죠.

너무 반가운 마음에 끝까지 공연을 구경하고

또 거금 천 엔을 기부하고 말았죠.

물론, 그 청년의 눈부신 미소를 답례로 받았지요


그리고 계절이 바뀌고 찬바람이 부는 겨울...

저는 그를 에노시마에서

우연이 한 번 더 만났답니다.

햇살이 참 좋은 날이었는데

학교 친구들과 맛있는 점심을 푸짐하고 먹고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는데

어디선가 '저를 응원해 주세요' 하는 그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거예요. 저는 무언가에 홀리듯

목소리의 출처를 찾아 헤맸는데

그날따라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지 찾질 못했죠.


친구들과 에노시마의 명물인 타고

센베를 안주 삼아 마신

캔맥주 몇 캔에 적당히 취해 역으로 결어가는데

커다란 배낭을 실은 오토바이가

딱 멈춰 서는 거예요.

놀란 가슴에 오토바이의 주인공을 빤히 쳐다봤죠.

헬멧을 벋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는데

글쎄 또 요코하마의 그 청년이지 뭐예요


왠지 아는 사람을 만난 거 같아서

나도 모르게 반가운 기색을 했는데

그도 나를 기억하는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짓는 거예요

무슨 말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머뭇거리는 순간, 그가 먼저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인사를 건네지 뭐예요.


신기했습니다. 이 낯선 도쿄에서 똑같은 사람을

우연하게 세 번이나 만나게 된 것이요.

그저 스치고 지나가면 몰랐을 우연을

그렇게 또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요


세 번의 우연... 인연일까요?

흔히 일어나는 일인데.. 저에게만 특별한 일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남은 생 잘 먹겠습니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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