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에서 겨울 분위기가 물씬 나는 가곡들이 줄줄이 이어지네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톡톡 쳐가며 말리고 커피를 내립니다.
향긋한 커피 향을 깊게 그리고 천천히 들이마셔봅니다.
요리조리 주전자를 돌려가며 정성껏 내린 커피를 담을 머그잔을 골라봅니다.
오랜 손때가 묻은 그 잔들 속에서 눈을 사로잡은 잔 하나를 꺼냅니다.
뜨개질을 하는 소녀가 그려진 머그잔 -
그럼요, 이 머그잔에는 저의 소소한 추억이 담겨있죠.
바야흐로 제가 18살이었네요. 까마득해서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그 나이에...
전 몰래 과외를 했었어요. 그때만 해도 사교육이 일절 금지였답니다.
지금이야 안 가면 안 된다는 학원들도 모두 쉬쉬하며 몰래 다녔답니다.
저는 운 좋게 엄마 친구 덕분에 제가 취약했던 수학 과외를 하게 되었는데요,
엄마 친구 아들이자, 제 초등학교 5학년 같은 반 친구인 A와 함께요.
A는 초등학교 이후 어쩌다 지나치는 것 말고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죠.
저보다 한참 키가 작았던 A는 어느새 훌쩍 자라 저보다 더 커 있었죠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반항기 넘치는 얼굴을 하면서도
찡긋하고 웃는 미소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죠.
처음엔. 경쟁적으로 수학 문제 풀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는데,
점점 이럴수록 서로가 더 피곤해진다는 것을 A가 먼저 알아챘죠.
잔뜩 숙제를 내고 뒹굴뒹굴하는 과외 선생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과외 선생님은 그의 사촌 형입니다) A는 슬쩍 메모를 건넸죠.
' 이거 다 안 풀면 안 보내준다. 반씩 풀자. '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죠.
우리의 공조 덕에 2-3시간 이어지던 수업 시간이 1시간 반으로 줄었답니다.
수업을 일찍 끝내고 선생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우리는 서로에게 농담을 하거나 근황을 묻기도 했는데,
어느 날, A는 첫눈이 오기 전에 여자 친구에게 뜨개질 선물을 받으면
대학에 합격한다는 이야기가 있다며 찡긋 웃었죠.
그 순간, 가슴이 쿵쾅거렸답니다
이 사인은 뭐지? 나에게 뜨개질을 해 달라는 건가?
한참 가사 실습 시간에 목도리 뜨기를 배우던 때이기도 했고
이왕 뜨는 거 A에게 주자고 마음먹었죠.
마지막 과외수업 날... 잔뜩 시험문제를 내고
딴짓을 하는 과외 선생님 몰래
우리는 메모를 오가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죠.
A : 겨울 방학에 뭐 하나?
나: 공부하겠지.. 엄마 등쌀에
A :한 번에 합격해서 이 집을 탈출할 거다
나: 배짱 좋다
A : 나 받았거든. 뜨개질 선물..
나:...
A :' 빨간 목도리.. 좀 쑥스럽긴 한데.. 독서실 갈 때 하려고
나: 좋겠다
그 순간, 울컥하고 서운한 마음이 차올랐지만
난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죠
결국, 내가 뜬 목도리는 고스란히 가방 속에만 있다
다시 내 서랍 속으로 돌아오고 말았죠.
집으로 돌아오는 그 길에 부는 겨울바람이
얼마나 차갑던지.. 마음이 서늘해서 눈물이 날뻔했답니다.
소녀 시절에 누구나 한 번쯤 빠지기 쉬운 착각이었지만
뭐랄까, 뜨개질을 하는 순간만큼은 두근두근 설레었답니다.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던지요.
겨울바람이 불면, 문뜩 그리워진답니다
저의 소녀 시절이 아주 잠깐...
남은 생 잘 먹겠습니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