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할까요?

by anego emi

산보.. 일본어로 산책이라는 말입니다.

산보라는 말이 일본어인 줄도 모르고

그냥 어감이 정겨워서 자주 사용하곤 했는데...

우리말이 아니라는 걸

마흔이 다 되어서 일본어를 배우며

뒤늦게 알게 되었지 뭐예요.


도쿄 유학시절... 가장 놀라웠던 것은

다름 아니라 동네마다 있는 공원이었죠.

아무리 작은 동네도 어디 한구석엔 공원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거든요.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면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며

그 동네 터줏대감인 고양이들이

산책을 다니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기도 했죠.

저 또한, 그 녀석들이 눈이 채지 못하도록

조용조용 함께 걷기도 했는데,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녀석들 때문에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답니다.


도쿄는 정말 방구석이 손바닥만 해서

나도 모르게 자꾸 답답함을 느끼게 되었는데요

그때마다 산책을 나가곤 했답니다.

구석구석 좁은 골목길을 따라

동네를 두리번거리며 한참을 걷다 보면...

센과 치히로의 한 장면처럼

숨겨진 공원이 발견되고,

그 공원을 살금살금 걷다 보면

공원 의자에서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잠이 든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를

지키는 고양이를 반드시 만나게 되죠.

그 풍경이 얼마나 평온하던지

가끔은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답니다.

(나이가 든 탓인지 이런 일상의 소소한 풍경들이 그 어떤 것보다 울컥하답니다)


산책하기 좋은 날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여름의 끝자락이자 가을의 초입이겠죠.

도쿄는 혼자 산책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산책 가이드 책도 있답니다.

동네마다 산책하기 좋은 코스를 소개하고,

산책길에 만날 수 있는 맛집들과

골목골목 숨어 있는 예쁜 가게들을

소개하는 작은 문고본이랍니다.

저는 주말마다 그걸 한 권씩 사서 들고

낯선 동네로 산책을 하러 가곤 했는데요

두리번두리번 길을 찾다 보면

저와 같은 책을 한 손에 쥐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자주 목격되었죠.

그때 생각했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나도 이런 산책 가이드 책을 만들어 보리라.'


왜 그런 날이 있잖아요.

어쩌다 생긴 보너스 같은 휴일...

갑자기 약속을 잡기엔 애매하고

그렇다고 집에서 뒹굴뒹굴 보내기에 아까운 날...

그런 날이야말로 혼자 어디론가

산책을 가기 좋은 날이 아닐까요?

이왕이면 내가 사는 동네보다는 낯선 곳에서...

그냥 걷기만 하는 것보다는

예쁜 소품을 파는 가게도 들러보고

취향이 남다른 작은 카페에서

향이 좋은 커피도 마시고

그러다가 슬슬 배가 고파지면

혼자서도 근사하게 분위기를 낼 수 있는

맛집에서 이른 저녁이나 혼술을 해도 좋겠죠.

나만의 속도로 걷고 즐기는

특별한 산책 같은 하루

그 하루를 가이드해주는 책이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뭐, 요즘은 그 역할을 SNS가

충분히 하고도 남을지도 모르지요)


남은 생 잘 먹겠습니다

< 아네고 에미 >


PS : 겨울의 강추위와 코로나가

좀 진정되면 동네 산책이나 갈까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수줍은 착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