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잔뜩 흐렸던 하늘에서
드디어 또 눈이 내리네요.
제법 눈이 많이 올 거라는
어제의 일기예보를 떠올리며
침대 위에 누워서 빤히 창밖을 올려다봅니다.
그러다 문득, 바게트 빵이
너무 먹고 싶어 지지 뭐예요?
그것도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갓 구운 바게트 빵.
그 빵을 도톰하게 잘라
그 위에 치즈와 햄을 고봉으로 올리고
통후추를 몇 번 갈아
시즈닝을 한 바케트 샌드위치.
점점 굻어지는 눈송이를 잠시 노려보다가
두툼한 롱 패딩을 걸치고 집을 나갔죠.
우산을 쓰기엔 왠지 이 아름다운 흰꽃 송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패딩에 딸린 모자를 눌러쓰고
역 근처에 새로 생긴 동네 빵집으로
발걸음을 향했죠.
프랜차이즈 빵집보다
빵 사이즈도 작고 가격도 비싸지만
오늘은 왠지, 이 곳에서 갖구워낸 빵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죠. 예상대로 문을 열자마자
후각을 자극하는 빵 냄새에 행복감을 느끼며
바게트 빵 반 덩어리를 사고, 평소에 잘 먹지도 않던
주먹만 한 크로와상도 덜컥 사고 말았죠.
아직도 온기가 남은 빵을 가슴에 꼭 껴안고
눈이 쌓인 거리를 조심조심 걸으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서른두 살에 혼자 떠났던
파리 여행이 떠오르네요. 아마도 주말에 몰아봤던
미드 때문 이기도 하겠지요.
드라마 속 젊고 아름다운 그녀가
펼치는 파리의 이야기보다
그녀가 아침마다 들르는 카페가,
그녀가 친구들과 먹어 치우는 음식이,
그녀가 밤낮으로 거니는
파리의 풍경들이 너무 좋았답니다.
(떠나지 못하니 드라마나 영화의 스토리보다
배경이 되는 도시나 풍경에 더 집착하게 되네요.)
서른두 살... 저는 12월에 혼자 파리로 갔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냥 파리로 가고 싶었거든요.
새해가 밝기 전에 돌아오는 일정을 잡고
여행사를 통해 핫 플레이스 근처에
호텔들을 예약하고
달뜬 마음으로 파리행 비행기를 탔죠.
드골 공항에 내리자마자
서늘한 바람과 함께 눈이 내렸죠.
처음에 너무 낭만적이다는 생각에
혼자 실실 웃곤 했는데, 눈은 점점 발목까지 쌓이고
호텔까지 찾아가는 여정은 뒤죽박죽이었답니다.
그 순간 생각했죠. '날씨복이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참, 예외라는 게 없구나.
이것이 인생이구나' 하고 말이죠.
호텔은 낡았고, 창문은 삐걱거렸고,
히터는 잘 나오지 않았고
뜨거운 물은 찔끔찔끔 나와서 애를 태웠죠.
첫날밤부터 좌절할 수 없었던 저는
주린 배를 안고 씩씩하게 동네슈퍼를 찾아 나섰죠.
와인도 한병 사고, 치즈도 사고,
무사히 파리에 도착한
첫 날을 자축하리라 굳게 맘먹었죠.
10시가 다 되어가는 밤거리엔 레스토랑 말고는
문을 연 곳이 없었고,
슈퍼들은 이미 셔터를 내리기 시작했죠.
어느새 눈은 그쳤지만 골목골목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은 손가락과 발가락의 감각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죠.
이쯤 하면 다 포기하고 호텔로 돌아갈 법도 한데
무슨 생각인지, 기어코 이것들을 사고 말리라 하는
강한 집념을 보이며 걷고 또 걸었답니다.
겨우겨우, 구멍가게 같은 이탈리안 슈퍼를 찾아내고
와인 한 병과 치즈와 햄이 들어간
바케트 샌드위치 하나를 사고
기쁜 마음으로 호텔로 돌아왔죠.
서둘러 샤워를 하고 침대에 몸을 구겨 넣고
와인 한 모금을 병 째 삼키고
차갑고 딱딱한 샌드위치를 한 입 배어문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답니다.
차갑기만 하던 그 샌드위치가
생각보다 속은 부드럽고
햄과 치즈의 맛이 조화로웠죠.
씹을수록 고소한 빵 맛이
햄과 치즈의 풍미를 더해주지 뭐예요?
게다가, 적당히 드라이했던
레드와인과 찰떡궁합이었죠.
어찌나 맛있던지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키득키득 웃으며, '파리에 오길 잘했지?'하고
몇 번이나 혼잣말을 내뱉곤 했답니다.
그 후, 저의 일정은
예상 밖의 강추위와 변덕스러운 날씨와의
파란만장한 사투의 연속이었지만...
찬바람이 부는 파리의 골목골목을 누비며 먹었던
바케트 샌드위치의 맛은 잊을 수가 없었죠.
차갑고 도도하지만 씹을수록 빠져드는 파리의 맛 -
문뜩 눈이 오는 날이면 그리워집니다.
파리에 다시 갈 수 있는 알이 곧 오겠죠?
남은 생 잘 먹겠습니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