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불면

by anego emi

제가 다녔던 대학교에는

은행나무가 참 많았지요.

가을이라는 이유만으로 낭만이

두 배가 되곤 했던 그 시절...

전 짝사랑을 했답니다.

그것도 제일 친했던 과 선배의 친구 J를요.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저를 애타게 했던

그 선배의 친구 J는 그렇게 잘 생기지도

멋지지도 않았는데

무엇에 끌려 그렇게 마음을 태웠을까요?


선배의 친구 J는 입학과 동시에

첫눈에 반한 과 선배가 있었죠.

그보다 한살이 많은 눈이

동그랗고 자그마한 인형처럼

귀여운 분이었는데요

일 년 동안 한결같이

그분을 향한 애끓는 마음을 고백한 후에

캠퍼스 최고의 잉꼬 커플이 되었죠.

사연이 이 정도인데도 저는 J가 좋았어요.


J는 도서관에서 저를 발견하면

무심한 듯 캔커피를 책상 위에 놓고 가기도 하고

우연히 같이 듣게 된 교양수업 시간에는

언제나 제 옆자리에 앉곤 했죠.

J는 저를 아끼는 과 선배와 절친이었고

자주 셋이 밥이나 술을 마신 적도 있었기에

그저 여동생 같은 제게 보인 별 뜻 없는 호의겠지만

그때마다 저는 가슴이 마구 뛰었답니다


그런데.. 그런 저에게 드디어 찬스가 왔지 뭐예요

워낙 사랑스러운 외모로 과에서

인기가 많았던 J의 여자 친구는

군대를 가야 하는 선배를 매정하게 차 버리고

다른 분을 만나기 시작했다는군요.

둘만의 사정이 어떠했는지 본인들이 아닌 이상

속속들이 알 수 없겠지요.

그러나, 그 당시 저의 절친인 K의 말을 빌리자면

(K는 J와 같은 과입니다)

한마디로 그녀는 **라하는군요.

마음의 상처를 입은 J는

한동안 캠퍼스에서 종적을 감추었죠.


어느 날, 저는 중간고사를 끝내고

과 선배와 맥주를 마셨는데요

연거푸 맥주 두 잔을 비운 선배가

J의 이야기를 꺼내는 거예요.

첫사랑이었던 그녀를 잊지 못한 J는

해서 안될 짓을 하고 말았다네요.

결국 병원으로 실려가서 죽다 살아난 J는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 중이라고.

그 순간, 제 마음이 얼마나 아프던지

펑펑 울고 싶은 걸 꾹 참았답니다.

그리고 애꿎은 맥주잔만 비웠죠.


그리고 며칠 후... 가을이 깊어가는 날

하늘은 잔뜩 흐렸고 잔잔하게 바람이 부는 날이었죠.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가기 위해

캠퍼스를 걸어가고 있었는데요

저 멀리 J가 걸어오지 뭐예요.

갑자가 가슴이 쿵쾅 거리고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땅만 바라보며 걷고 있는 제 앞에

J가 딱 멈춰 서는 거예요.

그리고 특유의 온아한 목소리로 말했죠.

'오랜만이네~'

그 순간 바람 훅하고 불어오면서

은행 비가 내리기 시작했죠.


달아오는 얼굴을 애써 감추고

고개를 들어 J를 보며 환하게 웃었죠.

예전보다 한층 야위고 생기 없는 얼굴에는

슬픔의 흔적들이 그득했답니다.

저는 J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웃기만 했는데요,

J는 그런 저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제 옆을 지나 앞으로 걸어갔죠.

저 또한 몇 걸음 걷다가 아쉬운 마음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죠.

그리고 희미하게 사라져 가는

J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죠.

그때, 갑자기 J가 고개를 휙 하고

돌리며 멈춰 서는 거예요.

그 짧은 순간, 서로 눈이 마두 쳤는데

깜짝 놀란 저는 고개를 돌리고

도망치듯 빠르게 걸어갔답니다.


그리고 몇 주 후... 군에 입대한 J를

배웅하고 왔다는 과 선배와

또 맥주잔을 기울이며 찢어지는

가슴을 술로 달랬답니다.


가끔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눈이 마주쳤던 그때...

제가 용기를 내어 J에게 다가갔다면

제 짝사랑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순간 제가 느꼈던 J의 처연한 눈빛은

저에게 내민 구원의 손길은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찬 바람이 부니까

문득 생각이 나네요.

겨울을 타나 봐요. 제가...


남은 생 잘 먹겠습니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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