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의 맥주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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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겨울의 맥주 맛을 아시나요?

맥주는 다들 푹푹 찌는 여름에 마셔야 제맛이라고 하지만

저는 차가운 겨울에 마시는 맥주를 더 좋아해요.

여름에 차가운 걸 마시면 배탈이 잘나서 그렇기도 하지만

한 겨울, 살 얼음이 내려앉은 창가에 앉아

방안의 훈훈한 온기를 느끼며 마시는 차가운 맥주 한 모금...

그 맛이 너무나 짜릿하거든요.


예고도 없이 눈이라도 펑펑 오는 날이면

맥주 몇 캔을 사서 눈 속에 묻어두는 거예요.

해가 지고 하늘이 깜깜해지면

살금살금 눈 속을 뒤져 맥주 캔을 찾아내죠.

그리고 작업실로 돌아와 라디오의 볼륨을 높이고

맥주 캔을 따고 숨을 천천히 내쉬고

한 모금 크게 마시는 거예요.

눈 속에서 골고루 차가워진 맥주는

상상을 초월하는 청량감과 톡 쏘는 맛을 낸답니다.


이렇게 맥주를 마시는 비법은요

제가 좋아하는 일본 만화 속에서 나오는데요

주당인 주인공은 어떻게든 술을 맛있게

먹는 법을 끊임없이 연구해서 실천한답니다.

그냥 몇 페이지 넘기기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이고 맥주 한 잔이 당기는 걸로 보아

저도 만화 주인공 못지않은 주당임이 틀림없네요.

(혹, 맥주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눈 속의 맥주에 도전해 보시길... 분명 깜짝 놀라실 겁니다)


도쿄 유학시절, 저는 이 맥주 한 잔이 참 그리웠답니다.

저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일본의 청춘들과 학교를 다녔는데요

모두 미성년자인지라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죠.

한 학기가 끝나고 종강 파티를 하는 날에도

술집이 아니라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피자와 소다를 마셨지 뭐예요.

그러니, 퇴근 후에 마시던 차가운 맥주 한 잔이

얼마나 그리웠게요?


저와 같이 밤늦도록 그림을 그리곤 했던 나고야 출신 J는

(저는 디자인 전문학교를 다녔습니다)

졸업 후 취직을 하면 제일 하고 싶은 것이 바로,

퇴근 후에 근처 이자카야로 가서

문을 열고 자리에 앉자마자

큰 소리로 '일단 맥주 한잔 주세요'라고 외치고

통 크게 반쯤 마셔버리는 거라고 하네요.

말하자면, 직장인이 되어서 하고 싶은 그들만의 로망인 것이죠.

게다가 도쿄는 서서 마시는 맥줏집이 많아서

혼자서 안주 없이 맥주 한 잔만 비우고

돌아가는 직장인의 모습도 흔한 풍경이죠.

일단 밥 대신 맥주 한 잔으로 허기를 때우고

집으로 돌아가 간단한 저녁을 먹는다고 하네요



늦은 출근길에 잔뜩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켜봅니다.

오늘 퇴근길에 마실 차가운 맥주 한 잔을 떠올리며...

물론. 집에서요.

(이 시국에 거리두기 실천은 기본이죠)



남은 생 잘 먹겠습니다

< 아네고 에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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