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한파 덕분에 창밖에 서리가 잔뜩 끼었네요.
까치발을 하고 맨 손으로 쓱쓱 문질러 봅니다.
순간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찬 기운에
마치 전기에라도 감전된 것 마냥
온몸이 짜릿해지네요.
이런 날,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은근슬쩍 기분이 좋아지는 건 왜일까요?
눈이 녹아 길바닥은 누가
분탕질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회색빛의 얼룩 투성이고,
그 위를 사람들이 조심조심
걸어가는 모습을 훔쳐보며
기지개를 쭉 켜어 봅니다.
그래도 지금에야 출근 시간이 제법 여유로워졌지만
제가 한참 회사를 다닐 때만 해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출근시간은 8시 반이었답니다.
한 번은 외주처에서 새벽까지 작업을 했는데
갑자기 눈이 너무 쏟아져서
꼼짝달싹 못하는 지경이 되었죠.
결국, 구석 소파에서 쪽잠을 자고
해가 뜨자마자 아침 일찍 대령해야 하는
광고 시안을 들고 첫 차를 타러 나갔는데
눈이 무릎까지 쌓여서 걸을 수가 없지 뭐예요.
저는 비닐로 몇 겹을 싼 시안들을
보물처럼 가슴에 앉고
씩씩하게 눈을 헤치며 걸어갔죠
조금씩 녹기 시작하는 눈에 바지는
무릎 위까지 다 젖고
신발은 걸을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를 내기 시작했죠.그래도 어떻게든 시간 내에 도착하겠다는
저의 신념은 추위와 이런 불편함을
깡그리 잊게 했죠.
출근 시간보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회사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저를 애타게 기다리는
선배의 얼굴을 보는 순간, 무슨 대단한 일을
해낸 것처럼 기쁘기까지 했답니다.
저의 투혼 덕에 무사히 보고를 끝낸 팀장님은
기쁜 나머지 입사이래 처음으로
조기 퇴근이라는 은혜를 저에게 베푸셨죠.
꽁꽁 언 도로 덕분에 저는
또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했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노곤노곤 쏟아지는 졸음에 머리도 채 말리지 못하고
기절에 가까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죠.
얼마나 지났을까요?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지만
어디선가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났죠.
잠결에 실눈을 뜨고 정신을 깨워보지만
이미 침대와 하나가 된 내 몸뚱이는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라고
거칠게 저항하지 뭐예요.
그렇게 또 한참을 자고 나서 새벽에야 눈을 떴죠.
잘만큼 잔 것도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배가 고팠거든요.
내 뱃속에서 새어 나오는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불 꺼진 방의 어둠 속에서
가녀린 비명소리처럼 울러 펴졌죠.
몸을 일으켜 생수 한 모금을 크게
삼키고 몽유병 환자처럼 부엌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훅하고 카레향이 나는 거예요.
순간, 생각했죠. '너무 배가 고파서
있지도 않는 카레향을 다 맡는구나'하고요.
그런데 부엌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갈수록
짙고 선명한 카레향이 후각을 자극하지 뭐예요.
두리번두리번 카레향의 출처를 찾기 시작했죠.
가스레인지 위에 놓은 노란 냄비 -
본능적으로 뚜껑을 열자 주황색의 당근과
깍둑 썬 감자가 듬뿍 든 카레가
한 냄비 가득 담겨있지 뭐예요?
'우와~ 어떻게 이런 일이?
우렁각시라도 다녀간 거야 뭐야 ~'
서둘러 가스불을 켜고
보글보글 카레가 끓기를 기다리며,
하늘에서 뚝 떨어질 리 없는 이 냄비가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를
식탁에 턱을 괴고 고민하는 데
기다렸다는 듯 문자가 오네요.
제 짐작대로 서로의 집 비밀 번호를 알만큼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회사 후배의 깜짝 선물이었네요.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못 먹은
춥고 배고픈 선배를 위해
퇴근길에 우리 집에 들러 우렁각시처럼
카레 한 냄비를 만들어 놓고 갔답니다
그녀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요리인 카레를 말이죠.
국그릇에 카레를 듬뿍 담고 즉석밥을 데워
정신없이 코를 박고 한 그릇을 뚝딱 비웠죠.
국물이 흥건했던 수프 같은 그 카레가
얼마나 맛있던지 천국의 맛 같았어요.
이렇게 찬바람이 매섭고 눈이 쌓이면
전 카레가 생각난답니다.
마음을 녹이고 나를 녹이던 평범하고 평범하지만
가장 따뜻하고 향긋했던 카레의 맛 -
오늘, 문득 몹시 그리워지네요
남은 생 잘 먹겠습니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