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른다

by anego emi

A와 B가 만나 인연이라는 관계를 맺습니다.

처음에 서로를 탐색하는 단계인지라

상대에게 마음을 더 쓰고

자신의 단점보다 장점을 어필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미세한 감정의 변화조차도

놓치고 싶어 하지 않죠.

그러다 인사쯤은 생략해도 문제없고

바쁠 때는 피드백이 조금 더디어도

괜찮아지는 사이가 되면...

서서히 상대방에 대한 트집을 잡기 시작하죠.

즉슨, 단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후로, 몇 번의 타협과 조율이 오고 가지만

각자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면, 이 관계에서 어떻게 하든

버림받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

갖은 수를 동원하기 시작하죠.


이런 관계의 시작과 끝은 연인뿐 아니라

친구, 동료, 이웃... 모두에게 해당되죠.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 관계에서

누가 승자가 되던지, 누가 패자가 되던지

상관없이 두 사람 사에에 일어난 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죠.

A는 자신이 유리한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B를 평가했을 것이고

B 또한 다르지 않았겠죠.


회사에서 자주 일어나는 관계에 관한

비극적 종말의 시나리오는 대부분 다르지 않아요.

오래전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면

저는 회사에서 일보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참으로 힘들었는데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기 방어가 강했던 탓인 거 같아요.

내 사람들(내가 인정하는 사람들) 하고만

어울리고 싶었고, 이외의 사람들에겐

참으로 냉정하고 무관심했죠.

승진을 하고 팀이 생기고 보니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을 후배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 뭐예요.

회사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할

팀원들을 스스로 채워야 하는 데

고민은 깊어지고, 그나마 믿을 만한 후배의

소개로 J를 만나게 되었죠.


당차고 씩씩한 모습에 호감이 갔죠.

진심으로 내 사람이 되어주길 바라며

내 사람들에게 J를 적극 소개해주고

우리들만의 인너 서클로 J를 성큼 끌어들였죠.

초반에 겸손하고 열정적인 모습으로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려 애쓰던 J는

슬슬 나와 똑같은 선상에 서서

다른 팀원들을 평가하기 시작했죠.

내 사람들 사이에서 불만의 말이 나오고

J가 사적인 모임에 끼는 것을

피하기 시작할 무렵... 한참 일에 바빴던 저는

점점 이상하게 삐딱해지는 J가 못마땅했죠.

그러나, 내 사람이라는 믿음은

아직 견고했기에, J를 붙들고

퇴근 후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속내를

털어놓으며 J가 좀 더 내 편에 서주기를 바랬죠.


그러나, J는 달라지지 않은 것도 모자라

심지어 저런 모습이 있었나 싶은 당돌함을 보이며

자신이 먼저 선수를 치기 시작했죠.

'팀을 나가고 싶다'라고 여기저기 말을 흘렸고

결국, 저의 리더십의 문제로까지

몰아가는 지경에 이르렀죠.

그 당시, J를 향한 배신감이 몹시 컸지만

그보다 저를 힘들게 했던 많은 사건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저는 번 아웃되고 말았답니다.


회사를 떠나고 시간이 한참 흘렀지만

솔직히 저는 J의 얼굴만은 다시 보고 싶지 않았죠.

그저, 내 눈밖에서 잘 지내기를 바랄 뿐이었죠.

그런데, 그런 J가 제법 잘 팔리는 에세이 책을 내고

그 책 속에 저에 관한 글을 써놓았다는 걸

후배 K를 통해 알게 되었답니다.

K는 저보다 더 격노하며 욕을 퍼부었죠.

저는 담담히 '다 지난 일인데 뭐 어때?

신경도 안 쓴다' 하고 웃어넘겼답니다.

소문으로 들은 J의 지난 행보가

그리 녹녹지 않았던 터라 그러려니 했죠.


몇 달 뒤, 오랜만에 들린 서점에서

우연히 J의 책을 발견했죠.

그냥 못 본 척 지나가려고 하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몇 장을 뒤적이는 순간...

운명의 장난처럼 저에 관해 쓴

반페이지 분량의 글을 발견하고

단숨에 읽어 내려갔죠.

그래요. 화가 치밀었답니다.

저도 모르게 '헉'하는 분노의 한숨이 새어 나왔죠.

철저히 J의 입장에서 묘사된 저는

제가 알던 제가 아니었고

그때의 제 마음은 깡그리 무시되었죠.


회사를 나오면서, 저는 J에 관해

아무런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았답니다.

둘의 관계는 당사자가 아니면

아무도 모르니까요.

서로의 입장과 처지에서 바라본

각자의 모습과 감정들은 확연히 다를 것이며

옭고 그르고를 따질 수 없을 터니까요.

그저 그런 상황 속에 놓인 둘의 관계가

그렇게 흘러갔을 뿐이니까요.

그러하므로, 침묵이 답이라고 생각했죠.


J도 그래 주길 바랬는데 아니었네요.

자신이 갈겨쓴 저 글을 제가 읽었을 때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배려했었다면,

그때의 제가 얼마나 힘겨워했었는지를

조금이라도 떠올려 주었다면,

그럴 수는 없었겠죠.

최소한 저를 빚대어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을

밝히지는 말았어야 했어요.

한참 잊고 지냈던 그때가 떠올라

한순간이라도 침울해질지 모르는

저를 위해서라도... 둘 사이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일로

남겼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아무도 모른다'라는 영화를 만든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의 말이 떠오르네요.

" 누가 감히 자신이 잣대로

선과 악을 나눌 수 있을까요?

그때의 그 사람이 되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른 법이니까요 "

자신의 관해 쓴 에세이니까

뭐 어쩌겠습니까 만은

오늘 제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조금 쓰라리네요.


아.. 오늘은 아무도 모르는

저만의 레시피로 만든

소맥을 한잔 하고 싶네요


<남은 생 잘 먹겠습니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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