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너무 가벼운 하루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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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는 이상한 징크스가 있어요.

고민과 걱정으로 밤낮을 허덕이다 못해

쫓기는 지경이 되면 말이죠

불현듯,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될 단초들이

환청처럼 들려오곤 한답니다.


예를 들면, 길을 가는 여고생들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섞인 수다 속에서

툭하고 새어 나온 한마디라던가

" 그딴 거 개나 줘버려 "

전화기를 든 채 마트를

활보하시는 목청 큰 아주머니의

단호한 충고라던가

" 세상 일이 내 맘대로 된다니? "

퇴근길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독서 삼매경인 그분의 손에 꼭 쥐어진

한 권의 책 제목이라던가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제 눈과 귀를 단박에 잡아버린

그 찰나의 순간들이

고민과 걱정 속에 꽁꽁 갇힌 저를

봉인해제 하기 시작하죠.

'그래, 어떻게든 살아질 거야

어떻게든 해결될 거야' 하고 말이죠


네, 맞아요. 전 제법 단순한 편이죠.

그러나 그거 아세요? 그 단순함의

뒷면에는 엄청난 소심함과

성실함의 늪이 있다는 사실을요.

한없이 빠져들었다가

죽을 만큼 숨이 차면

훅하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잖아요.

그 순간에 발동되는 것이

저에게는 단순함 인지도 몰라요.


최근 저의 가장 큰 고민은

반백살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 입으로 말하기도 쑥스러운데요)

'남은 생 어떻게 살아야 할까?'입니다

아마도 며칠 전에 읽은

소설 때문인지도 몰라요

'70세 사망 법안, 가결'

제목만으로 흥미를 유발하는 이 소설은

사회가 고령화되어

노인들을 케어하는데

지나치게 많은 희생과 비용이

든다는 점을 감안하여

70세가 되면 안락사하는 것을

법안을 만들고 국회에서 가결된 후에

보이는 사람들의 행동과 태도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제법 흥미진진하답니다.

물론, 공감 가는 이야기도 많고요.


작가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우리에게 제법 무거운 질문을 던지죠

'오래 살아도 되고 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날이 과연 올 것인가?'

책을 덮은 순간, 가슴에 크고 단단한

돌멩이 하나가 쿵하고 떨어졌죠.

지금 보다 스무 살쯤 젊었을 때는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오래 살아 뭐하냐? 굵고 짧게 살자'

하고 외친 곤 했는데

그렇게 말한 저나 그들이나

오래 살고도 남을 기세네요.


몇 날 며칠을 이팔청춘 때나 할법한

고민에 빠져서 글 쓰는 것도

그림 그리는 것도 뒤로한 채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리모컨 버튼을

누르는 그때, 티브 속 누군가의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났답니다.

" 남은 생은 좀 가볍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요?

그동안 애썼잖아요. "


단순한 저는 그 순간, 결심했답니다.

가볍게 살기로요.

버겁고 무거운 목표도

헛된 욕심도

타인을 향한 부러움도

더 이상 갖지 않으며

가볍게 오늘을 살아가기로 말이죠.

갑자기 대단한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 해지지 뭐예요?


오늘은, 아껴둔 홍차를 끓이고

초콜릿 덩어리가 푹푹 박힌

달달한 쿠키를

내게 너무 가벼운 하루에게

정성껏 대접해야겠어요


<남은 생 잘 먹겠습니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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