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올 듯 말 듯 스산하게 흐린 날...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후배 P가
집 앞으로 불현듯 찾아왔죠.
조그만 양옥을 개조한 카페로
P를 이끌고 주인장의
시그니처 드립 커피 두 잔을
부탁하고 창가에 자리를 잡았죠.
수심이 그득해 보이는 P는
그녀가 속한 세계의 사람들에게
털어놓지 못한 고민이 있는 듯 보였죠
이럴 땐... 회사라는 속세에서 벗어난
저와 같은 프리랜서 여인이
고민 상담자로 그만이죠.
P의 고민은 일이 턱에 찰 만큼
힘들다는 것이었는데요
게다가 운마저 따라주지 않아
하는 일 만다 이상하게 꼬이고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어요)
결국, 팀장으로서 P의 업무 능력을
의심하는 지경까지 이르러 회사를
가는 것이 지옥 같다고 했죠
회사를 나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그 많은 시간을 뭘 하며
보내야 할지 자신이 없다고 했죠.
P의 시각에서 보기에
치열하게 회사생활을 했던 제가
그것을 어떻게 떨쳐내고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었는지가
궁금하다고 했죠.
글쎄요...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제가 일을 그만두며 들었던 생각은
분명, 그녀와 같은 종류의
두려움이었던 것 같아요.
'하루를 꼬박 혼자서 뭘 하며
채워야 하나' 하는 두려움...
또한, 세상은 나에게 더 이상
러브콜을 보내지 않을 것이며
기억조차 못할 것이며
영영 잊히고 말 거라는 두려움...
그런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깨달음이
가슴으로 와 닿는
순간이 분명 온답니다.
그 순간이 오면, 그 간의
괴로웠던 시간은 약이 되죠.
그리고 그제야 지금까지의
나를 차분히 뒤돌아 보게 되죠.
아픔보다는 기쁨을
실패보다는 성공을...
그러다,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면서
기쁨보다는 아픔이
성공보다는 실패가
인생을 더 나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그러니까.. 그런 두려움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조금 무감각해지면 되는 거예요.
아주 잠시... 시간에 무감각해지고
사람들에게 무감각해지고
세상에 무감각해지면 그만이랍니다.
그간 미뤄놓았던 것들을 실컷 하면서
느슨하게 내 기준대로 하루를 살고
일주일을 뭉개고 한 달을 날려버리면서
지금까지 엮이고 설인 일과
서서히 정을 떼고 관계를 정리하고
추억 따위도 태워버리면 되는 걸요.
뭐 어때요? 인생, 길고 긴데
1년쯤 열심히 살지 않는다고
큰일이 날일은 절대로 없거든요.
P에게 오랫동안 손때가 묻은
회사의 낡은 책상을 정리하면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향긋한 커피 한 잔을 대접하고
P의 이야기를 절대
다른 누군가에게 발설할 것 같지 않은
평온한 얼굴로 묵묵히 들어주는 일이죠.
이러다 비라도 오면
P와 함께 청포도향이 나는
차가운 샤도네를 한 잔
마시러 가야겠어요
<남은 생은 잘 먹겠습니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