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프인가요?

by anego emi
St_Petersburg_Watercolor_Texture_5.9 2.JPG

' 선배, 미대 나온 거 아니지? '

광고회사 시절, 제법 알아주는 미대를 나온

디자이너 선배의 섬네일을 앞에 두고

제가 장난으로 던지곤 했던 말이었죠.

그때마다 선배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 야, 난 시각디자인 전공이거든...

그림은 회화과 애들이나 잘 그리는 거야

그림 그리는 거 그거 엄청 스트레스야 ~'


미대를 나온 사람이

그림 그리는 게 스트레스라니...

그 당시엔 선배의 변명 같은 그 말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막상 제가 그림을 그리겠다고

다 늦게 학교에 진학을 하고

날마다 무언가를 그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살다 보니

그 말을 백번 이해하고도 남지 뭐예요.


지금이야,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지만

그때만 해도 아크릴, 수채화,

색연필 등등으로 그림을 그려야 했는데요.

겨우 스케치를 끝내고, 물감을 펼치는 순간부터

망치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 다가오죠.

이런 저희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시던 선생님은

수업시간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색을 만드는 것부터 채색하는 과정까지

친절하고 재미난 설명으로

모두를 집중하게 했죠.


어느 날, 학원제를 앞에 두고

그려야 할 주제의 발표가 끝나고

선생님이 궁금한 것이 있으면

뭐든지 좋으니 질문을 하라고 하셨죠.

그러자, 평소에 결석을 밥먹듯이 하는

노란 머리의 L군이 손을 번쩍 들지 뭐예요.

그는 시큰둥한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죠.

" 공들여 그린다고 그렸는데 결국 망치면

어떻게 하죠? 다시 그리기 진짜

싫을 거 같은데... 그 순간부터 슬럼프 아닌가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선생님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으시다가

특유의 카랑카랑하고 해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죠.

' 망칠 수 있지... 누구나... 그 순간 말이야

그리던 그림을 가만히 두고

그냥 집 밖을 나가는 거야.

공원이든, 강가든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걷다가 다리가 슬슬 아파지면

근처 이자카야든 맥주집이든 불쑥 들어가서,

술이든 음료든 한잔 시켜놓고

그곳의 단골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거야.

그러다가 슬쩍 눈이 마주치면

' 인생이란 무엇인가요?' 하고

질문을 던져봐. 그러면 그분들의

주옥같은 인생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고, 그걸 한참 듣다 보면

저절로 다시 그림을 그리러 돌아가고 싶어 질 거야.

그때 집으로 돌아가서 망친 그림은

미련 없이 찢어버리고 다시 그리는 거야.'

황당한 만담 같은 선생님의 해결책은

모두의 폭소로 이어졌고

저 또한 한참을 깔깔 거리며 웃었답니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허망함도

스스로를 향한 혹독한 질책도

한순간, 잠깐 내려놓았다가

다들 그렇게들 살아간다는 일상의 깨달음이

드는 순간, 그런 감정들은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죠.

선생님은 그림 망치는 거쯤이야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그 두려움이 사라지는 순간부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진짜 즐거워지니까요.


전, 요즘 그림 그리는 것이

제법 편해졌는데요, 그 이유는

잘 그리려고 하는 마음을

내려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냥 그리고 싶은 것을

생각 없이 그리자' 하고 마음을 먹었죠.

그랬더니, 늘 저를 짓누르던

그림 그리기에 대한 두려움과 스트레스가

어느 순간 사라지기 시작했답니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는 마음이

슬럼프의 이유인지도 몰라요

이성이 감성을 찍소리도 못하게

눌러버리니 숨이 막힐 수밖에요.

생각은 설렁설렁 그리고 마음은 즐겁게...

그렇게 반복하면 그게 실력이자 내공이 되는 법 -

그러니까 맘 편히 사는 게 최고랍니다.


<남은 생 잘 먹겠습니다>

아네고 에미





매거진의 이전글롯데 자이언츠를 응원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