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처럼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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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취기가 올랐지만

한 구역 정도는 걷기로 했죠.

초여름의 밤기운이 서늘하다가도

금세 또 후덥 해집니다.

보라색이 군데군데 뒤 썩인

밤하늘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합니다.

" 그냥 들어주기나 할걸 "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는 것인지요

꼰대처럼, 열 번 참다가 한번 터트린

말문이 끝날 줄 모릅니다.

제가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그들의 관심사 속에는

그들의 현재 속에는

저의 이야기가 스며들 여지가

그다지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말이죠.

공감을 자아내지 못하니

레퍼토리 같은 옛날이야기가

약간의 말투와 분위기를 바꿔

다시 튀어나오고... 심성 좋은 후배들은

적당히 웃음을 머금고

듣는 둥 마는 둥 하지요.

이 시점에서, 전 와인 한 모금을

통 크게 마시고 스스로를

진정시키곤 한답니다.


회사를 떠난 지 10년이 다 되어가니

이제 후배들에게 해줄 이야기가

점점 줄어듭니다.

연락을 주고받는 횟수도 줄고

얼굴 보는 횟수는 더 줄지요.

그러나, 치열했던 서로의 젊은 날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끈끈한 연대감을 갖게 한답니다.

그런 마음이 잊을만하면 안부라는 핑계로

서로를 챙기게 하는지도 몰라요


아직도 회사에 남은 후배들은

습관 저럼 일에 얽힌 이야기를 하게 되고

가끔은 언쟁의 지경에 이르지요.

어느 누구의 편에 서지도 못하는 처지인 저는

술잔만 홀짝이다가 게스 침례 한 눈을 뜨고

뿌루퉁한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죠

"나 때는 안 그랬는데..."

그걸 끝으로 입을 굳게 닫고

그저 후배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해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주절주절

이어지는 이야기는

결국, 대화의 주도권을

억지로 제가 채오는 지경에 이른답니다.

그럴 때마다, 매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후회와 반성을 하면서 말이죠

" 그냥 들어주기나 할걸..."


어떤 유명 기업의 마케터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죠

유능한 마케터가 되려면

' 점쟁이처럼 들어라'

상대방이 하는 말을 점쟁이가

하는 것처럼 적절한 리엑션과 함께

묵묵히 듣는 것만으로도

문제의 답을 찾을 수 있다고요.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것에

대한 해결책을 스스로 알고 있는데

(기업의 경우도 CEO나 개발자는

제품의 문제점을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단지, 그걸 입 밖으로 먼저 꺼내는 것이

두렵거나 확신이 없는 거라고요.

그러니 그걸 털어놓는 순간까지

잘 듣고 있다가... 그 말이 나오는 순간 -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하는 거죠.

" 당신은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어요"


저는 오늘도 코로나로 한동안 뜸했던

지인들과의 모임에 가기 앞서

거울을 보며 연습을 합니다.

윗니와 아랫니를 가볍게 깨물고

가지런한 옥수수처럼 미소를 지으며

잘 듣기 위한 준비를 한답니다.

이렇게 노력하고 신경을 쓰면서

말 많은 꼰대가 아닌

말 잘 듣는 선배로 늙어가고 싶거든요.


< 남은생 잘 먹겠습니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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