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이 흐르는 회의실...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 마라톤 회의가 이어집니다. 슬슬 짜증이 섞인 누군가의 목소리가 잠시 커지고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가 단박에 잘라버립니다. 또 침묵이 흐릅니다. 축 처진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가는 걸 느낍니다. 그러나 오늘이야 말로, 반드시 결론을 내어야 하기에
다시 커진 목소리들은 담배연기처럼 몽글몽글 쏟아 오르다가 순식간에 뒤죽박죽이 됩니다. 그 순간, 누군가 한창 열을 올리는 팀장님을 보며 힐끔힐끔 훔쳐보며 생각합니다. '아.. 이렇게 사는 것도 지겹다.
훌훌 떠나고 싶다.'
어느 날 갑자기.. 싸우는 것이 싫어졌습니다.
꽃이랑 풀벌레들과 살기로 했습니다.
회의실에서 끝없는 회의
테이터와 씨름하며 효율 계산
어떻습니다까. 좋은 아이디어가 나왔습니까?
1년 따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말들을 하지만
'조금 더 천천히 지나가 주면 좋겠다'싶어서 와 버렸습니다.
2002년 봄
지금 격려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힘내라' '기운 내'라고 하는 것보다
나라면 이곳에 데려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곳의 벚꽃처럼 1년에 단 한 번이라도 좋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광고업계에서 꽤 유명한 JR의 광고 카피입니다. 물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카피이지요.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회의실에서 보내야 했던 저로썬, 이런 카피들을 보면 공감을 너머 감동이란 걸 하게 되지요. 그 시절, 회의란 결론 없는 말싸움의 연속에 가깝고, 브레인스토밍에 관한 기술이 부족했던 저희 세대들은... 안타깝게도 목소리 큰 사람, 직급 높은 사람이 이기기 마련이지요. 그럴 때마다 네모난 회의실을 치기 어리게 박차고 나가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상상을 하곤 하지요. 이 카피는 정확히 그런 마음에 불을 지르는 셈입니다.
흔히 광고에서는 '이 제품을 쓰면 당신이 어떻게 달라질 것이다'라고 하는 사용 후, after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 카피는 그 반대로 before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떠나온 후의 마음보다 떠나고 싶은 마음에 중점을 두고 있지요. 목적지가 어디이든, 그곳이 얼마다 아름답고,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가 보다, 떠날 수 있는 용기와 마음을 조용조용 응원하지요. 이런 접근 법은 '소비자가 얼마나 깊이 공감하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핵심은 '소비자에게 하고 싶은 말'보다 '소비자가 듣고 싶은 말'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소비자가 되어보고, 그 상황에서 나라면 어떤 말을 들었을 때, 내 마음이 움직이는지, 여러 가지 가능성을 놓고 써보는 것입니다. 쉽게 감정 이입이 잘 되지 않는다면, 카피를 쓰기 전에 거울 속 나를 들여다보며 말을 걸어보는 것도 좋고, 타깃의 이미지와 부합하는 사진을 보며 상상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광고는 제품과 소비자에서 감정의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이니까요.
슬슬 몸과 마음이 흔들리는 가을입니다. 떠나고 싶은 그 마음에... 당신의 브랜드가, 당신의 제품이 불을 지를 그 한마디는 무엇인지요? 떠나기도 망설여지고 떠나서도 안 되는 요즘엔... 글쎄요. 추억으로 떠나는 그 마음을 소환해 보면 어떨까요? " 마음껏 떠나도 좋았던 그 시절.. 당신은 무엇을 했나요? 그때를 떠올리며 맘에 드는 음악을 고르고, 마실 것을 고르고, 멋진 옷을 고르고, 읽을거리나 볼거리도 고르고... 핸드폰은 잠시 꺼두는 게 좋겠죠? 그렇게 찬란한 가을을 맞을 당신만의 준비를 하는 겁니다. 가을의 추억 한 자락을 내 것으로 만드는 단 하나의 방법은... 오늘을 내 것으로 만드는 감성 충만한 몰랑몰랑한 방법들을 찾아내는 것 아닐까요?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