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승이에게
잘 지내니? 또 푹푹 찌는 여름이 성큼 왔다.
끔찍한 열대야에 뒤척이던 도쿄 못지않게
서울의 여름밤도 만만치 않구나.
학원제가 끝나고 너와 유카타를 차려입고
동네 마쯔리를 갔던 그때가 떠오르네.
살얼음이 몽글몽글 이슬처럼 매치던 캔 맥주를
참 많이도 마셨다. 불어 터진 야끼소바와 함께...
여름 방학이 다가오면
물감이며 돌돌만 스케치북이며 노트북이며
양손 가득 들고 낑낑대며 덴샤를 타기 위해
가파른 언덕 같은 계단을 오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광고 포스터가
내 맘을 사로 잡곤 했단다.
도쿄 철도에서 판매하는 청춘 티켓의
한정 판매 포스터 - 광고 회사에 몸담으면서
가장 좋다고 욕심났던 청춘 티켓의 광고를
실시간 보는 즐거움은 실로 감동이었단다.
어쩌다, 가슴이 너무 뭉클해서
양손이 든 가방을 털썩 내려놓고
한참을 빤히 처다 보곤 했단다.
그때였던 거 같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 학교에서
선착순으로 모집한 학생들에게
크로키와 데생 보충수업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무료로 주었지. 너와 나는
수업을 신청하고 장마가 시작되기 전
3주간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연필을 부지런히 사각거렸지.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참 대단했었다.
학생들로 꽉 찬 교실에서 누드모델 덕분에
에어컨도 제대로 못 틀고 너무 덥고 힘들었는데
단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수업을 듣고
과제를 내고 선생님들에게
나아지고 있다는 칭찬까지 얻어냈으니 말이다.
마지막 날, 학교 앞 이자카야에서
생맥주 몇 잔을 마시고 피곤한 몸에
금세 오른 취기 덕분에 휘청이던 내 눈에,
어김없이 청춘 티켓의 포스터가
훅하고 들어왔단다.
'청춘, 그 이름만으로 마음이 설렌다면
당신은 청춘입니다. '
기억조차 까마득했던 내 청춘이
순간 데자뷔처럼 희미하게
지나가면서 다 늦게 청춘들의 틈새에서
애를 쓰는 내가 순간, 안쓰럽기도 했단다.
주책맞게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훌쩍이는 나를 빤히 보던 너는
나에게 손을 내밀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지.
" 언니, 우리도 저거 사자. 청춘 티켓 "
3,5.7... 홀수로만 판매하는
청춘 티켓, 5장을 사고
게다가 학생 할인까지 받고
도쿄역에서 이른 새벽에 출발하는 첫차를 타고
몇 번의 기차를 갈아타고 도착했던
오사카의 밤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단다.
프리패스처럼 티켓을 보여주면
어떤 역에 내려도 괜찮았고
다음 차를 기다리며 그 지역의
맛난 간식들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해안을 가로지르던 기차 안에서는
얼마나 마음이 설레고 신나던지
정말도 다시 스무 살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단다.
교토의 선술 집에서 마셨던
일본 소주는 독했지만 향긋했고
갓 튀겨낸 투명한 야채튀김의 고소하고
오묘했던 그 맛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단다. 돌아오던 기차에서
너는 나에게 한 장 남은 청춘 티켓을
건네며 말했지. " 언니의 청춘을
기억하고 응원하며.. "
나의 마지막 청춘 티켓은
겨울 방학이 끝날 무렵에 쓰였는데
그날도 하늘이 어찌나 푸르고 선명하던지
아침 산책을 나갔다가 무작정
옷을 차려입고 신주쿠 역으로 달려갔단다.
그리고 바다가 아름다운 이토 역까지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몇 개의 역을 지나고
티켓에 스탬프를 찍어주며
잘 다녀오라는 역무원들의 미소에
환하게 답하며 너의 얼굴이 떠올랐단다.
그리고 네가 나에게 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선물인 청춘 티켓을
손에 꼭 쥐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단다.
'청춘.. 저 푸르른 하늘이
내 눈에 들어올 때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자. 종착지가 없어도
어디서든 내릴 수 있는 용기.
그게 바로 청춘이다'
혜승아
건강하고 행복해라
너의 빛나는 청춘의 한 자락을
언니는 눈부심으로 기억하고 있단다
영원히..
<남은 생 잘 먹겠습니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