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관두기로 결심했던 그해 12월이었죠.
첫눈이 왔던 다음날... 출근길의 매서운 칼바람에
온몸이 꽁꽁 얼어붙는 거 같았죠.
하루 종일 아낌없이 히타를 틀어대는
후끈한 사무실에 꼼짝 않고 있어도,
수시로 몸을 감싸는 듯한
서늘한 한기가 좀처럼 가시지 않았죠.
아마도 그 당시 저는 몸보다 마음이
더 추웠는지도 몰라요.
그러다가, 퇴근길에 결심을 했답니다.
그동안 죽어라 열심히 일만 했으니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겨울'을 선물하자고요.
그다음 날, 저는 호주행 비행기표와
숙박권을 예매하고
크리스마스이브날, 호주로 날아갔답니다.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호주는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있었죠
아침부터 산책을 하고, 해변가에서 책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너무 곤히 자서
해가 뉘엿뉘엿 질 때야 눈을 떴지 뭐예요.
그 덕분에 목과 양팔이 빨갛게 타서
기포가 생길 지경이었지만
그날의 햇살과 바람의 감촉은
저에게 '행복이란 이런 기분이구나'
하는 걸 알게 해 주었지요.
프리랜서로 일한 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고
바쁘지도 할 일이 넘치는 것도 아닌데...
저는 그 좋아하는 바다의 햇살도 바람도
자주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답니다.
나이가 드니 엉덩이가 무거워진 탓도 있지만
최근 들어서는 '코로나'라는 전 지구적 이유가
떠나고 싶은 제 마음에 발목을 잡곤 했지요.
그런데, 무슨 바람인지 오늘 아침에
무표정한 얼굴로 양치질을 하다가
거울을 빤히 들여다보며 혼잣말을 했답니다.
' 오늘은 가자. 바라던 바다로...'
동서울 터미널로 가서 양양으로 가는
출발시간이 가장 빠른 고속버스를 예매하고
허기진 배를 터미널 앞에 줄지어 있는
포장마차에서 인상 좋은 어머님이
즉석에서 싸주시는 김밥과 멸치국물로 채우고
고속버스를 타고 양양으로 갔답니다.
마침 장이 서는 날이라 시장을 보러 나오신
동네 어르신들과 간이 버스정류장에서
인구해변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죠.
여행 온 듯한 어여쁜 청춘들이
긴 나무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고새도 아까운지 게임을 하며
해맑은 웃음을 쏟아내네요.
막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연인을 태운
훈훈한 인상의 청년은 손가락 하트로
떠나는 그녀에게 애틋한 작별인사를 건넵니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죠.
'일상은 이렇게 누군가에겐
소중한 추억이 되어 흘러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말이죠.
인구해변 역에서 내린 저는
서퍼들의 핫플레이스인
죽도해변으로 발걸음을 옮겼답니다.
평일인데도 제법 많은 서퍼들이
파도를 타거나 카페나 오픈 바에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죠.
그 모습이 참으로 평화로워 보였어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과
까맣게 태운 피부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며
해변을 유쾌하게 활보하는 그들만의
세상이 이곳에서 펼쳐지는 듯했어요
이방인은 저는, 해변이 빤히 보이는 오픈 바에
자리를 잡고, 차가운 생맥주 한잔을 주문하고
서퍼들의 모습을 스케치를 하거나 에세이를 읽었죠.
청명한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쏟아지는 햇살과
시원한 바닷바람은 알코올로 긴장이 풀린 저를
노곤 노곤하게 만들었는데, 깜빡 졸음이 몰려오면서
까마득했던 호주에서의 기억이 떠올랐죠.
'아~ 너무 좋구나'하는 감탄과 함께
그때의 행복했던 기분을 온몸으로 감지했답니다.
이렇게 오기면 해도, 이렇게 금세 행복해지는데
왜 그렇게 오기가 힘들었을까요?
우울증은 마음만 걸리는 게 아니라
몸도 걸릴 수 있다고 하네요.
몸이 우울증에 걸리면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지는
즉, 무기력에 빠지게 되는데
그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진짜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 기운이 감지되는 순간,
(오늘 아침의 저처럼 말이죠)
조금이라도 내 몸의 활기를
깨워줄 일들을 자꾸 벌리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하네요.
(오늘 제가 무작정 떠나온
이' 바라던 바다'처럼 말이죠.)
또 한 번의 가을이 시작되었어요.
올 가을엔 미루지 말고 바라던 바다든
산이든 강이든 꼭 한번 가보시길...
내 몸이 우울증에 빠지기 전에 말이죠.
<남은생 잘 먹겠습니다 >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