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생은 일하지 않습니다 9

잠 못 이루는 밤은 생각보다 많다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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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빠지지 않는 뱃살만큼이나 고민스러운 것이 바로 불면일 것이다. 게다가 꼬박꼬박 일찍 일어나 회사를 가야 할 이유가 없어진 나에겐 밤이란 그저 낮의 연장선상이 되고 만다. 그러나 눈을 감고 어떻게 하든 조금이라도 잠을 자야 한다. 누군가 머리만 대면 어디서든 잘 자는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만큼 잠은 숨 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다. 미국 어학연수 시절 학부에서 미술 심리학을 가르치며 틈틈이 ESL 학생들에게 영작문을 가르치는 50대 후반의 여교수님이 계셨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은 지금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에 대해 써보자고 했다. 그러자 한 친구가 잠이 안 오는 것이 너무 괴롭다고 했다. 아무리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아 너무 힘들고 아침마다 피곤한 몸과 무거운 머리가 하루의 의욕치를 사정없이 다운시킨다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선생님은 그 친구를 빤히 보며 빙긋이 미소를 짓고 말했다. " 그럼 안 자는 거야. 차라리 자는 걸 잊어버리고 다른 걸 하는 거야. 억지로 자려고 애쓸수록 잠은 더 달아나니까. 그냥 외면하는 거야. 잠이란 녀석을... " 그렇다. 안 자면 되는 것이다. 선생님의 단순하지만 명확한 해결책이 그 순간 나는 가슴 깊이 와 닿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얼마나 잠 못 이루는 많은 밤을 잠을 자려고 애썼던가. 예민한 성격 탓에 내일 출근해서 해야 할 일이 떠오르는 것 만으로 심장이 뛰고 풀지 못한 숙제가 남았다면 그 속도가 두배로 빨라지고 나에게 상처를 주었거나 혹은 내가 상처를 준 사람이 머릿속에 맴돈다면 온몸과 정신은 나에게서 잠을 필사적으로 밀어내고 만다. 억지로 눈을 감을수록 선명하게 상상 속의 잔상들이 내 눈앞에서 펼쳐졌다. 막 대리를 달고 회사가 강남 사옥으로 이사를 가 그 당시 집이 동교동이었던 나는 한 시간이나 넘게 걸리는 출퇴근 시간이 너무 버거웠다. 엄마를 조르고 그동안 모아 놓은 돈을 탈탈 털어 강남의 원룸으로 이사를 했다. 그 당시 턱에 찰만큼 일이 많았던 나는 친한 후배 커플이 틈틈이 짬을 내 구해준 새집으로 주말에 겨우겨우 짐을 옮겨놓고 또 회사로 갔다. 그리고 그 착한 커플이 대충 정리해놓은 나의 새 보금자리로 한밤 중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낯선 이 집이 왠지 서늘했다. 정이 들 것 같지 않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날마다 일에 치여 사람에 치여 내 몸과 마음은 메마르고 지쳐갔고 스스로를 자학하며 끝없이 쏟아낸 부담감과 걱정에 매일 밤 잠을 설쳤다. 그리고 멍해진 눈빛만큼 점점 심약해진 나는 어김없이 이상한 가위에 눌렸다. 지금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오싹한 일들이 몇 달 동안 띄엄띄엄 나의 잠 못 이루는 밤에 일어났다. 새벽 무렵 누가 문을 두드린다. 벨을 누르는 것도 아니고 두터운 쇠문을 쾅쾅하고 사정없이 두드린다. 겁이난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아본다. 그 순간 털컥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 후 누군가 들어왔다. 분명 4인 가족이었다. 아빠와 엄마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꼬마 남자아이와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까지. 그들은 나를 힐끔 보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곁 옷을 벗고 옷장문을 열어 짐들을 정리했다. 순간 나는 있는 힘껏 무어라고 외쳐보지만 결국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고 점점 숨이 막혀오는 순간 '악~'하는 작은 탄성과 함께 눈을 떴다. 그후로도 고민이 있거나 힘든 일이 생기면 어김없시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런 밤이면 온 집에 불을 밝히고 티브를 켜고 정신을 또롯히 하려고 애썼다. 결국, 나는 몇 달 후 그 집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나를 사정없이 몰아치던 팀에서 새로운 팀으로 둥지를 옮기고 서서히 안정을 찾았고 잠 못 이루는 밤이 조금씩 줄어들었고 그덕인지 가위에 놀리는 일도 말끔히 사라졌다.


이제는 회사를 떠났으니 내일이 오면 또 여지없이 맞닥뜨려야 할 쇠 덩어리 같은 일도 나를 마냥 힘들게 했던 그 누군가도 없다. 그래도 나의 잠 못 이루는 밤은 생각보다 많아지고 있다. 그 밤에 나는 또 몽롱한 내 앞길을 걱정하고 다음 날 해야 할 일을 억지로 만들어내고 심지어 이렇게 혼자 늙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까지 조금씩 꺼내기 시작한다. 그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잠 못 이루는 밤을 그저 잠을 자지 않아도 평온한 밤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말이다. 아울러 나를 흔들지 않는 여유와 남은 인생에 대한 두둑한 뱃장도 필요할 것이다. 조급해하지 말아야 한다. 억지로는 그 무엇이든 어떤 이유에서든 힘든 것이고 결국 스스로를 자학하게 된다. 언젠가 스스로에게 그저 토닥이며 굿 나이트이라고 말해줄 그날이 올 거라 믿으며 나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위로해본다.


해결책 : 따끈한 허브차를 마신다. 차가 싫으면 무거운 레드와인 한잔도 좋다. 그리고 내일도 출근해서 업무에 시달릴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X를 떠올리며- 나쁘지만... 남의 불행이 결국 나의 위로가 되고 만다 - 심야식당 같은 은근히 포근한 만화책을 본다. 가끔 라디오를 친구 삼아 수다도 떨고 콧노래도 흥얼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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