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포기하기로 했거든...' 작년에 자신이 운영하던 작은 회사를 후배에게 물려주고, 강원도 양양으로 이사를 간 선배가 있다. 총명하고 언변술도 뛰어나며 품성까지 좋아서, 은퇴하기엔 아깝다고 모두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결심은 단호했다. 자신은 세상을 포기하기로 이미 마음을 굳혔으므로, 더 이상의 아쉬움도 미련도 없다고 했다. 괜스레 의미심장한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란 나는, 혹시 내가 모르는 몹쓸 일이라도 그녀에게 생겼던 것은 아닌가 하고 순간 걱정이 앞섰지만, 그녀의 말에는 깊은 속뜻이 있었다. 그녀가 세상을 포기한다는 뜻은 속세와 담을 쌓고 살겠다는 말이 아니라, 소위 세상이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더 이상 아등바등 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회사 대표쯤 되면, 이런 차와 이런 집 정도는 살아줘야지.' '그 나이면 통장에 얼마쯤 쟁여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 ' 등등 이런 기준과 잣대가 자신을 끝없는 욕망의 덩어리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고 했다. 회사도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자신이 없어도 후배의 역량만으로도 거뜬히 돌아가고, 자신은 재택근무를 하며 간간이 중요한 결정이 필요한 순간에 도움을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살던 집을 전세를 주고, 그 돈으로 바다가 저 멀리 보이는 영양의 아담한 2층 주택을 빌려, 그녀가 좋아하는 책과 사진으로 집을 꾸몄다고 했다. 팀장 시절, 나와 나란히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던 선배의 얼굴이 떠오른다. 선배는 언제나 가볍게 몇 번의 마른기침을 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무대로 걸어 나갔다. 드디어, 선배는... 그동안 불끈 쥐었던 두 주먹을 활짝 펼치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