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에 좀처럼 요리를 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새 냉장고는 눌어붙은 장류를 제외하고 텅텅 비어 있다. 김치 국물만 찰랑이는 플라스틱 통을 꺼내 바닥에 깔린 김치들을 숟가락으로 모으니, 그 양이 제법 되었다. 버리기에는 아까운 양이다. 머릿속에서 이걸로 뭘 할 수 있을까 를 떠올리며 멍하니 김치통을 내려다보는 그때, 라디오 디제이가 마지막 곡을 소개한다. ‘푸치니의 오페라, 마농레스코 중에서 한곡을 골라 들려드리며 저는 내일 이 시간에 찾아올게요.” 마농레스코. 대학시절 자주 가던 단골 카페의 이름이다. 학교로 향하는 골목의 초입에 있던 그 당시 제법 이국적인 인테리어를 자랑했던 카페… 커피값이 다른 곳 보다 조금 비쌌던 그곳은 새하얀 리넨 식탁보가 덮인 동그란 테이블에 푹신푹신한 소파가 있었고, 언제나 잔잔한 영화 음악이 흘렀다. 그 시절의 카페들은 식사메뉴로 볶음밥, 오므라이스, 돈가스 등을 팔았는데, 이 메뉴를 시키면 후식으로 커피와 차를 공짜로 마실 수 있었다. 학식이나 학교 앞 분식집보다는 비싼 음식값이지만, 쾌적한 분위기와 공짜 커피까지 생각하면 아깝지 않은 가격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곳에서 자주 먹었던 점심메뉴는 김치볶음밥이었는데 고슬고슬 볶은밥에 송송 박힌 시큼한 김치, 보름달 모양의 노른자 가 반질반질 윤이 나던 계란 프라이 그리고 고명이자 장식으로 곁들여진 문어 모양의 비엔나소시지… 보는 것도 그 맛도 좋았다. 불현듯 오늘 남은 김치로 내가 해야 할 요리는 김치볶음밥란 생각이 들었다. 바닥에서 건져 올린 김치를 요리 가위로 잘게 자르고 기름을 두르고 볶다가 즉석밥을 넣었다. 뭉친 밥알을 나무 주걱으로 쿡쿡 눌러 볶은 김치와 섞다가 김치 국물을 조금 더해 감칠맛을 냈다. 금세 완성된 김치볶음밥을 접시에 담고 조미 김 한통을 꺼냈다. 짭조름한 김에 김치볶음밥을 싸서 한 입 가득 씹는다. 아무런 양념을 하지 않았는데도 간이 딱 맞았다. 허기 탓인지 순식간에 접시는 바닥을 드러내고 기름진 주홍색 얼룩만이 남았다. 설거지를 하다가 문뜩 마농레스코에서 잔뜩 멋을 내고 새침하게 앉아 원서를 뒤적이던 내 모습이 반짝하고 떠올랐다. 그리고 약속을 하지 않아도 금세 이곳에 모이곤 했던 그때의 친구들… 지금은 미국에 살고 있는 그 친구들이 가슴 시리도록 그리워졌다. 이마에 몽글몽글 돋아난 땀을 훔치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툭하고 떨어진다. 누군가 그랬다. 행복이란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라고. 내일 점심은 오랜만에 점심 약속을 해야겠다. 함께 있는 것 만으로 마음의 허기를 채워주는 그 누군가와… <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