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에 한기가 느껴졌다. 가을이 깊어지더니 그 끝에 찬바람을 끌고 와 겨울과 바통 터치를 하려는 모양이다. 나는 머릿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밖보다 집이 더 추운 도쿄의 겨울을 떠올려본다. 두 눈을 감은채 곧 판매가 시작될 편의점 어묵과 왕만두, KFC의 겨울 한정판 수프, 겨울에만 마실 수 있는 초콜릿 맥주 등… 겨울이 좋은 이유를 손꼽아 본다. 어쩌면 서울에서 누군가가 나를 보고 싶다는 핑계로 쓸쓸한 연말을 탈출하러 올지도 모르겠다. 이 조그만 방에서 온기를 나누며 겨울밤을 보내는 상상을 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어쩌면 나는 지금 조금은 외로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늦가을 타는 것일지도…
며칠 전에 꾼 꿈이 잊히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쫓기듯 허겁지겁 기차에 올라타던 나, 빈손이다. 목적지도 모른다. 기차는 터널을 지난다. 저 멀리 희미하게 빛이 새어 들어온다. 어디선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소리를 따라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긴다.
아마도 이 꿈은 며칠 전 읽은 책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삶의 어느 시점에서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었을 때 예상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순간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는 때도 있다.’ 나는 이 구절에서 덜컥 겁이 났던 것 같다. 급하게 결정한 퇴사 그리고 마흔 살의 유학, 그림 공부,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될 수 없는 작가... 내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올라탄 기차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내가 내린 기차에서 나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선후배들과 점점 멀어지는 그 기차의 끝 그리고 결국 사라질 것이다. 이 꿈이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다시 그 기차에 올라타야 한다는 무의식의 신호이면 어떡해야 하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만 낭비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야 그럴 일은 없다. 그냥 순간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내 꿈으로 투영된 것뿐이다. 내가 올라탄 이 기차는 반드시 내가 꿈꾸는 미래의 목적지로 갈 것이다.
오늘은 오후 수업이 없는 날이다. 한국 유학생 H와 함께 일본 드라마에도 나온 적이 있는 이다바시의 노천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그림을 그린다. 나는 주로 얇은 유니펜으로 작업을 하기에 어디서든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녀 또한 나에게 영향을 받은 탓인지 이번 과제는 펜으로 끝장을 보겠다고 했다. 우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한다. 제법 쌀쌀하지만 오후의 가을 햇살은 포근했고, 파란 하늘과 잔잔한 강 위에 반짝이는 윤슬이 아름답다. 펜을 놓고 멍하니 그 풍경 속에 빠져든다. 물에도 움직임이 있고 색깔이 있고 감정이 있다던 선생님을 말을 떠올리며 뚫어져라 강을 내려다본다. 내 눈에 담긴 물의 감정은 물의 것일까 나의 것일까.
갑자기 T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디자인 회사며 출판사며 포트폴리오를 열심히 들고 뛰어다녔으나 취업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30번째 거절을 당하고 자포자기한 선생님은 포트 폴리오를 쓰레기 통에 던져 버리고 무작정 지금 막 도착하는 덴샤를 탔다고 했다. 그리고 창 밖으로 강이 보이자 역이름도 확인하지 않고 내렸고,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사고 강가로 갔다. 강을 내려다보며 그림쟁이가 된 자신의 선택과 신세를 한탄하며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벌건 대낮부터 강가에서 맥주나 마시는 인생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자문하다가 문득 강기슭에 듬성듬성 난 콩알만 한 구멍에 눈이 갔다. 그 구멍을 뚫어져라 응시하는데 과자부스러기인지 쌀인 지 알 수 없는 알갱이를 수십 마리의 일개미들이 콩알만 한 구멍 속으로 나르고 있었다. 일렬로 줄을 서서 줄다리기를 하듯이 일용할 양식을 나르는 그 개미들을 무아지경으로 지켜보다가 고개를 드니 어느새 강 위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선생님은 그 순간 마음이 벅차오르면 결심을 했다고 했다. 그래 포기하지 말자. 저 개미들처럼 끝까지 가보자. 그림을 더 열심히 그리자. 하고… 우리는 이 지점에서 박장대소를 했는데 나는 왠지 선생님의 속내를 알 것 같았다. 선생님은 분명 이렇게라도 자신을 다잡아서 자신이 올라탄 기차에서 내리고 싶지 않았을 터였다. 그 후 선생님은 취업대신 대학원에 진학했고 그때 만든 작품들이 기업에 팔렸고, 그 후원으로 전시를 열고 결국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고 했다. 결국 개미들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하며 선생님은 우리를 또 한 번 크게 웃게 했다. 내년이면 우리는 졸업을 하고 그때의 선생님처럼 우리가 올라탄 기차를 타고 쭉 가든 내리든 선택해야 한다. 선생님은 그 선택이 자신의 결정이어야 하지 누군가의 결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면접에서 자신을 거절한 것은 자신이 아니고 그들이고, 그들의 결정 때문에 그토록 애타게 열정을 불태워온 그림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개미들의 앞만 보고 걸어가는 그 행진처럼 말이다. 나는 다시 펜을 꽉 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의 선택은 흔들리지 않기를 그래서 이 기차에서 내리는 일이 없기를. 결코 내가 내린 기차에 다시 오르려 애쓰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며...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