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도 걸어도

by anego emi

주말이면 나는 어김없이 산책을 간다. 목적지 없이 집 근처 골목골목을 배회하거나 아직 가보지 않은 동네를 찾아다닌다. '도교 산책'이라는 소책자가 있다. 들고 다니며 볼 수 있는 가볍고 얇은 수첩 같은 이 책은 도쿄에서 산책하기 좋은 동네를 소개하고 취향별 산책로를 짜준다. 책이 알려준 데로 역에서 코스를 따라 걸으면, 보물찾기 하듯이 개성 넘치고 예쁜 가게들과 아름다운 공원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물론, 맛있는 음식과 커피도 빠질 수 없다. 나는 특히 마지막에 시장이 포함된 코스를 즐겨 다녔는데 그 이유는 시장에는 그곳에서 만 먹을 수 있는 오랜 노포들의 군것질 거리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 반나절을 걸으면 적당히 허기지고 차가운 생맥주 한잔 생각이 간절해진다. 오늘 산책의 마지막 종착지인 시장에는 생맥주는 물론이고 찰떡궁합인 싸고 맛있는 안주거리가 넘쳐난다. 북적되는 시장에서 낯선 사람들과 길쭉한 벤치에 나란히 앉아 먹고 마신다. 그러다가 그들의 손에 쥐어진 얇은 책이 도쿄 산책이라는 걸 눈치채면 반가운 마음이 들곤 했다. 이렇게 멋진 가을날의 주말, 딱히 만날 사람도 약속도 없지만 그냥 보내고 싶지 않기에 무작정 집을 나와야 했던 그 마음. 그리고 그 마음에 불을 지른 고마운 그 책 덕분에, 우리가 함께 나란히 앉아 같은 마음으로 같은 맥주를 즐기는 것이다.


도쿄에 와서 가장 많이 한 것은 아마도 걷는 것이다. 처음에는 길을 찾아 헤매다 걷고 그러다가 호기심에 구경삼아 걷고, 시간이 지나면서 성냥갑 같은 작은 집이 답답해서 걷고, 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림을 그릴 소재를 찾아서 걷고 또 걷는다. 걷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어쩌면 나는 이곳에서 걷지 않으면 버틸 수 없기에 걷는지도 모르겠다. 수시로 닥치는 걱정들과 후회들 그리고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훅하고 불어오는 찬바람 같은 외로움을 떨쳐내기 위해 나는 걷는다. 땅을 보고 걷다가 하늘을 보고 걷다가 사람들을 보고 걷는다. 걸어도 걸어도 끝날 것 같지 않은 나의 산책이 이곳에서 계속된다. 어쩌면 이곳을 떠나도 계속될지도 모르겠다. 인생은 이렇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지만 걷고 또 걷는 것이 아닐까? 걷다 보면 보이고 발견하고 만나게 되는 소소하지만 대단한 것들을 위해서…


오랜만에 일본 남사친과 조우했다. 늘 바쁜 그가 오늘은 짬이 난다며 먼저 문자를 보냈다. 일본인들은 가족 혹은 정말 친한 사이가 아니면, 먼저 전화로 안부를 묻거나 약속을 잡는 일이 없다. 궁금한 것을 포함해 사적인 모든 질문은 문자로 하고 문자로 답한다. 뿐만 아니라, 당일 날 즉흥적으로 약속을 잡는 일도 없다. 최소한 일주일 전에 상대의 의사를 정중하게 묻고 약속을 잡는다. 그러나 나의 일본 남사친은 예외다. 외국계 마케팅 회사에 다니는 그는 갑자기 문자를 보내 모 브랜드 론칭 파티에 나를 초정하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회의가 취소가 되어 한가해졌다며 소위 번개를 하기도 한다. 이런 방식에 더 익숙한 나는 그의 이런 돌출 행동이 늘 즐겁다. 종강파티도 피잣집에서 소다를 마시는 미성년자들에 둘러싸여 있다가, 그야말로 제대로 어른인 그를 만나서 술을 마시고 그가 쏟아내는 짠내 나는 직장 이야기가 정겹다. 어디에서나 진상이 있고 그 진상에 대처하는 방법은 제각각이지만 크게 다르지 않음을 새삼 실감하며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세련된 스타일과 외모와 달리 그는 일본 소주를 즐겨 마셨다. 물론, 안주도 그것에 어울리는 소위 일본식 시장안주들이었는데, 말하자면 소금을 솔솔 뿌려 숯불에 통째로 구운 반건조 생선 구이나 식초와 소금물에 절인 고등어 초밥, 재례된장에 찍어먹는 제철 야채모둠, 담백한 오이나 배추절임 같은 것들이다. 이런 안주의 취향도 나와 딱 맞았기에 나는 그와 함께 하는 술자리는 늘 기대가 되었다. 물론, 그가 고른 일본 소주들은 최고였다. 얼음에 타서 한두 잔 마시다 보면 맥주병 크기의 일본 소주를 둘이서 금세 비우고, 입가심으로 맥주까지 마시고 술집을 나오게 된다. 그는 꼭 역 근처에 있는 라면 집에서 라면을 먹어야 술이 깬다며 라면을 먹자고 조르곤 했는데, 나는 이미 꽉 찬 배 속에 더 이상 아무것도 넣을 수 없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러면 그는 삐친 아이처럼 칫하는 소리를 내며 씩씩하게 혼자 라면을 먹으러 갔다. 나는 덴샤를 기다리며 웃음이 났다. 우리가 술 마시고 꼭 포장마차에서 어묵이나 가락국수를 먹듯이 일본인들은 라면을 먹는구나. 하는 생각에… 아 갑자기 회사 앞의 자주 가던 포장마차의 잔치 국수 한 그릇이 간절해졌다. 이번 일요일 미사를 끝내고 이모네로 가서 잔치 국수를 만들어 먹어야겠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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