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맛의 기억

떡볶이는 나의 힘

  

4학년 때 인천에서 대구로 이사를 갔다.

전학 온 나는 부끄러움 많은 '서울말' 쓰는 낯선 아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친구들의 텃세가 너무 심해서 발 동동거리며 친구 만들기에 안테나를 곤두세웠던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몰입’이라는 단어가 어울렸다. 친구 만들기에 몰입했던 시간들. 낯선 곳에서 친구 없이 사춘기를 맞는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한 건지 그 어린 나이에 너무나 잘 알고 있었나 보다.

'서울말' 쓰는 내게 친구들이 호의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다가온 아이들 모두 친구는 될 수 없었다. 새로 생긴 초등학교의 대다수는 동네서 큰 아파트 단지에서 사는 아이들이었으며 그 아파트에 대해서는 할 말이 참 많다. 대단지 아파트에 거주하는 아이들의 엄마 아빠의 직업은 전문직이다. 지적으로 풍요롭고 경제적으로 든든한 배경이었다. 누구는 의사, 누구는 교수, 누구는 선생님 등의 직업군이었다. 내가 어린 나이에도 교실을 제 집 드나들 듯 들락날락하던 아줌마(누구의 엄마)들을 또렷이 기억할 정도면 나와 얼마나 마주쳤던 건지. 이전에 살던 월미도에서와는 차원이 다른 유년시절이 시작된 것이다. 한동안 긴장이 몸에 밴 생활이었고 서로를 견제하고  상대방의 의중을 살피느라 뇌가 몹시 많은 일을 하던 시간이었다.     

전학 후 2년 후, 뭉쳐 다니던 친구들의 리더를 따라 한 친구를 따돌린 경험이 있다. 폭력적이기보다는 교묘하게, 이것이 집단 따돌림의 첫 경험이었다. 리더는 유명한 교수의 딸이었고 그들만의 그룹에 약하고 어리숙한 아이를 넣네마네 하며 지네들끼리 지지고 볶고 말이 많았다. 나는 이 그룹에 끼고 싶었다. 여학생의 반 이상이 이 그룹에 속했으니 나 역시 그래야만 안정권에 들 수 있었다. 그러나 한동안 잘 놀다 얼마 안 가서 나는 그룹을 빠져나와 중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조용히 지냈다. 빠져나왔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게 그들의 대화에 동조를 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혼자가 되는 것이다. 친구들은 가진 것도 많고 험담도 심했다. 과외를 하고 있었고 다수가 소수를 따돌리는 행위가 어떻게 발전(?)하는지도 직접 보여주고 있었다. 부와 명예가 있는 집안의 아이들이 행동하는 것들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떡 볶 이 

내 기억의 떡볶이는 여학생 그룹 친구들을 초대해서 엄마가 차려주시던 간식이다. 음식 솜씨가 별로인(우리 가족 모두의 기준으로) 엄마께서 딸의 분부를 받들어 한껏 차려주신 떡볶이와 어묵. 딸 셋 키우면서 낯선 도시로 이사와 시부모님 모시느라 혼이 나가셨을 엄마. 그런 엄마에게 나는 친구 초대 며칠 전부터 조르고 조른다. 놀라운 정도로 맛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엄마는 피식 웃는다.

“그냥 하는 거지 그깟 떡볶이.”  “엄마 그럼 안 돼. 그깟 떡볶이가 아니라고. 정말 맛있어야 한다고…….”

그 친구들을 초대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내가 너의 그룹에 들어가도 될 만한 수준인 거니? 우리 집 2층 집이라 불편해 보여도 아파트인 너희 집보다 클 거야. 어때? 너희 엄마보다 울 엄마가 해 준 떡볶이가 더 맛있지? 너희 엄마 밥 잘 안 해주시지? '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의 소녀는 그 당시 엄마에게 요구사항이 지나치게 많았다. 친구 초대용 간식 하나로 소녀의 자존심을 걸고 있었다.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떡볶이 하나에 다 녹여져 있다. 매번 실패했던 엄마의 분식이 그날따라 향기롭고 풍부한 맛이었다. 달콤맵싸름한 것이 간도 딱이었다. 잔잔한 밀가루 떡에 양배추로 가득 단맛을 내고 부산 어묵 큼직하게 썰어놓은 그날의 떡볶이. 그날따라 친구들도 나에게 모두 다정했다. 

그 후로도 지금까지 떡볶이 없으면 내 인생사가 얼마나 재미없었을까 싶을 정도로 사연이 많은 음식이 되었다. 떡볶이 맛집은 메모를 꼭 해둔다. 첫째를 가졌을 때 입덧 때문에 변기 잡고 토악질만 하던 남루한 시간에도 끼니때만 되면 떡볶이가 생각나 혼자 뒤뚱뒤뚱 사 먹으러 갔다. 남들은 아이 낳으러 병원 가기 직전 고기 먹고 들어간다는데 난 떡볶이를 먹었다지. 코로나로 하루 종일 붙어 있는 큰애와 티격태격 싸우고 나서도 “가윤아, 오늘 점심 뭐 먹을까?” “그야, 떡볶이지” 떡볶이로 대동 단결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보고니 인생의 ‘빨간 맛’을 알게 되는 순간순간에 떡볶이가 내 곁에 있어주었다. 나에게 인생의 다양한 빨간 맛 중 빨간색으로 위안을 주는 것은 떡볶이가 유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