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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시로바로앉는여자 May 19. 2020

아빠와 딸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읽고.

절룩절룩.

유난히 절룩거리시는 다리가 보기 안쓰러워 먼저 말을 붙였다. 우리 부녀는 ‘밥 묵었나’로 시작해 ‘밥 묵었다’로 끝나는 새 심플한 부녀다     

"아빠 다리가 왜 그래요?"

"응. 철심 뺐다"

"여태껏 괜찮다가 갑자기 수술을 했데?"

"더 잘 걸을라꼬."     


엄마 아빠가 대구를 떠나 대부도로 가신지 3년이 되었다. 아빠의 고향이고 아빠의 유년과 장년의 기억이 함께 했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모셔진 대구를 떠나는 게 쉽지 않았을 터, 역시나 아빠가 쉽게 적응하지 못하신 듯했다. 그동안 교통이 불편했을 텐데 자주 대구에 내려가셨고 코로나 초기에 당분간 대구를 못 갈 것을 예감하셨는지 보훈병원에 가서 철심 빼는 수술을 하고 버스를 4시간이 타고 홀로 다녀오셨다. 아빠는 불안정한 다리를 가지고 어디든 다니신다. 그래서 나이 70이 넘어도 돌봄이라는 단어는 아빠와 아주 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늘 딸 셋은 엄마에게 탁 붙어있었다.

엄마는 원래 우리 편 아빠는 남의 편이라는 듯.     


철심의 역사는 오래되었고 30년 만에 소환되는 아빠의 아픈 기억이다.

딱 아빠가 내 나이 때에 군 복무를 하시다가 트럭에 깔리는 큰 사고를 당했고 오랫동안 병상에 계셨으며 많은 수술과 재활을 반복했다. 당시 해군 소령이었던 아빠는 나라에서 그동안 수고했다며 이것저것 받았는데 그것으로 우리 딸 셋은 대학도 무사히 마쳤다. 으스러진 팔과 다리뼈에 철심을 박고 30년을 살았는데 철심이 아직 그대로인 줄은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참으로 무심한 세월이다(사실 무심함은 오직 나다. 글을 쓰면서도 부끄러워 에둘러 세월을 탓했다) 나는 세월을 탓하며 아빠의 절룩거리는 다리를 보고 말했다.

"그런데 왜 전보다 더 불편한 거야? 걸음이 더 못하네."

"전에는 철심이 튀어나와 신발에 닿아서 상처가 나서 수술해버렸는데 지금은 아예 발목이 힘을 못 받네."

여기서 아빠의 바짓가랑이를 뒤집고 다리를 봐드렸어야 했는데 무뚝뚝한 딸은 멈칫하며 그냥 속으로만 삼킨다. 대신 튀어나온 말

"그러게 고만 좀 다녀. 이제 대구도 내려가지 말고. 대구 안 가서 얼마나 좋아. 아빠, 코로나걸렸데잖어 주차장 앞 건물 사람들. 여기서 텃밭 가꾸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맨날 먼데까지 그렇게 다녀 다리 아프게"

고작 한다는 말이 이 정도다.

왜소하고 납작해진 아빠가 안쓰럽다는 표현은 늘 이렇게 삐뚤빼뚤하게 나간다. 코로나를 여러 번 들먹이며 대부도에 정착하시라고 당부를 전화 넘어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기도 한다. 그런데 당부라는 것은 8할이 잔소리이지 아빠의 마음이며 몸 상태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좀 가만 계시라고 하는 것은 분명 월권이었다. 우리 딸 셋은 아빠께 별로 관심이 없었다.  

    


작년 미술치료를 배우고 재미있어서 엄마 아빠에게 적용해 본 적이 있다. 엄마 아빠의 그림을 '처음' 보게 되니 나의 무심함이 오버랩되면서 뭐하자고 나는 여태껏 책을 읽고 미술치료 따위를 배우고 있나 싶었다.

힘없고 흐드러진 그들의 그림 앞에서 눈물을 참느라 소리톤을 높였다. 엄마는 성격처럼 가느다랗고 예민해빠진 풀을 몇 가닥 그렸다. 분명 나무를 그리라고 했건만. 예상한 엄마의 그림에 이래저래 설명을 해주니

“내가 그렇지... ”라고 하신다.

아빠의 그림은 신선했다. 그리고 나무를 그리는 짧은 순간 아빠가 미소를 짓는다. 아빠는 미소라는 게 없는 사람이다.

무성한 가지와 나무의 상처.

아빠는 아직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시고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너무 늦었지만 나는 작년부터 아빠에 대한 연민이 생겼다. 유년시절부터 늘 혼자였던 아빠. 평생 외로웠지만 그냥 이렇게 살아갔겠구나 싶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고장 나면 고장 났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딸들은 들어주지 않았구나.  어느 날, 엄마가 먼저 가버리고 아빠가 시골에 남겨졌을 때 나는 과연 아빠를 어찌 돌볼 것인가. 생각을 종종 해본다. 아빠가 자식들의 돌봄을 받지 않고 잘 살아나가길 바라보지만 그럴 가능성은 최근의 행동을 보면 크지 않아 보인다.

-보일러 켜는 법을 자주 잊는다.

-70대 중반에, 매일같이 술을 드시는지라 운전면허 반납을 해야 하는데 하루에 5번도 더 운전을 하고 횡 나가신다.

-LPG가스가 매번 신경 쓰였다. 밸브를 잠그지 않으신다.

-75세인데 자꾸 일을 하고 싶어 하신다. (여기서 일은 집안일이 아니라 월급을 받고 하시는 일을 말한다. 다리가 불편하고 잠을 못 주무시는데 자꾸 이력서를 낸다. 심지어 매번 연락이 온다.)

-고기를 자꾸 태워서 드신다. 까맣게 될 때까지.    

이렇게,

대구에서 제일 깔끔했던 남자가 대부도에서 제일 지저분한 남자가 되어간다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보면서 나의 아빠를 헤아려보는 드문 경험을 하게 되었다. 평소 내 마음속 가족의 서열 중 가장 마지막 위치에 자리 잡은 아빠다.


20대, 예술을 하고 싶은 청년의 가난의 경로를 따라가는 길은 불편했다 아니 괴로웠다. 40대 중반이 다가오니 사회 도처의 크고 작은 부조리가 내 책임의 일부분인양 생각되는 게 많아지기 시작했다. 청년의 30대가 좌절되지 않도록 같이 옆에 쪼그려 앉고 싶다. 쪼그려 앉아서 이 책을 열심히 팔아야겠네.

작가의 돌봄은 잘 키운 자랑스러운 아들이 해내는 효도도 아니고 연민도 아니다. 가족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돌볼 것인가에 대한 보편적 문제라고 작가는 담백하게 말했다. 나 역시 앞으로의 문제를 그렇게 생각해보기로 하였다.    


 

월요일이다.

태어난 지 43년 만에 처음으로 아빠의 하루가 궁금해졌다.

작가가 아빠의 건축일을 찍은 다큐멘터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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