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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시로바로앉는여자 May 01. 2021

어떤 식탁

"요번 생일에 뭐 필요한 거 있어?" 남편이 물었다.

"응 시간, 그리고 밥"

물어본 자기가 바보라며 재수 없지만 간절한 나의 대답을 무시했다. 나는 지금 충분하고 쓰다 말 정도로 넉넉한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5시간마다 찾아오는 끼니 걱정을 하지 않는 진정한 자유의 시간이다. (우리 애들은 간식도 많이 찾는다)

활동량도 많지 않은 현대인에게 삼시 세 끼는 사치이자 과잉이라며 한때는 여러 가지 신빙성 없는 이론을 끌어다가 '주말엔 두 끼만 먹는 거라고 입이 닳도록 이야기했건만. 요번 주말에도 눈뜨면 밥 달라는 두 아이와 저녁이면 가족을 위해 무슨 요리할 건지 물어보는 남의 편 때문에 세끼 숙제 푸느라 억울한 시간이다.

나는 요리를 잘하는 사람의 그 고차원적이고 종합적인 사고방식과 영험하기까지 한 ‘손의 위력’을 존경하는 사람이다. 나는 같은 음식도 그때그때 맛이 다르게 요리하는 사람이기에. 

김치찌개 역시 매번 한결같이 다른 맛이 나온다. 그렇게까지 맛이 다채로울 수 없는 음식인데 말이다. 좋은 식자재 종종 어렵게 구해다가 쓰기도 하는데 결과는 참담했다.

25프로의 성공확률.

일주일 중 주말 저녁엔 고기를 굽거나 면을 먹는다. 평일 5일 중 청국장이나 된장은 이틀 정도 중복으로 먹을 수 있다. 그러면 일주일에 4번의 찌개나 국을 끓이는 셈. 4번 중 1번만 성공이다. 약 3회는 성에 차지 않는 맛이라나. 그런대로 먹을 만하지만 맛있다고 하기엔 양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는 맛이라고 했다.

그나마 10년 차가 넘어가면서 하얗고 멀건 국의 맛 내기에 조금 자신감이 붙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멀건 국류의 간을 어찌 맞추는지를 몰라 늘 그날의 메뉴 앞에 자신이 없었다. 예를 들어 멸치국수나 감잣국 그리고 콩나물국 같은 종류가 나를 작아지게 했다. 감칠맛 나고 풍부한 맛이 나오게 하기 위해 육수를 잘 뽑아야 하는 것을 알지만 그 육수라는 것도 내가 뽑으면 밋밋해진다는 것이 큰 문제다. 건새우와 양파껍질 그리고 파뿌리를 황금비 율대로 넣고 끓인 육수에는 무조건적으로 감칠맛이 돌았으며 마지막으로는 참께 두 알만큼의 미원과 청량고추로 화룡정점을 찍었다.

"그래, 이 맛이야!!"


똥손의 납작한 요리관을 가진 나에게도 손대면 톡 하며 터질 것 같이 생생한 맛을 낼 줄 아는 요리가 있었으니 바로 차돌된장찌개다.

차돌로 말할 것 같으면 결혼하고 나서야 그 진가를 알게 된 소고기 부위라고 할 수 있다. 고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고기 찾을 일 없는 나도 후루룩 구워서 후추 잔뜩 기름장에 찍어 먹으면 거부감 없이 든든한 느낌이 든다. 아이들 반찬 없을 때 깍두기랑 차돌을 구워주면 맛있어를 연발하며 잘도 먹는다. 뭔가 열심히 요리한 흔적을 남기고 싶을 때는 차돌과 청양고추를 담뿍 넣어 된장찌개를 끓인다. 손님이 오신다는 비보를 접하면 숙주와 차돌을 가득 구워 생와사비장과 곁들여 낸다. 중 타이상 한 것 같은 자부심을 맛볼 수 있다.

아이 둘이 학교에서 급식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온 어느 화창한 봄 내 생일날, 남편은 이른 저녁에 중국집에 요리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나에게 밥 안 할 자유를 선사하고 싶다나.

그래 이걸로 퉁치자 싶어 투덜 되는 아이 둘을 데리고 중국집에 갔다.(아이들은 의외로 외식을 정말 좋아하지 않으며 게다가 짜장면도 좋아하지 않는 희귀종이다)

평소에 먹지 않는 중국요리는 늘 첫 숟가락만 환상적이다.

오늘 하루 두 끼를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했다. 그래 뭐 그러고 보니 생일선물 제대로 받긴 받은 거 같다. 우리 1호도 오늘만큼은 '승질'부리지 않고 얌전했으며 어제 던진 생일선물의 답 '시간과 밥'은 이렇게 남의 편이 지켜주었다.

12년 차 주부가 깨달은 사실은 오직 이것이다. 

남이 해 준 음식은 멀건 국에 밥 한 공기라도 진수성찬 같다는 것. 

이제 외식도 말고 내 생일에 비비고 미역국 끓여 "와이프님, 진지 드세요"라고 해주면 좋겠네. 그래도 그날은 세상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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