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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왕봉안 Feb 07. 2021

5. ‘드레퓌스 사건’에 뛰어든
코난도일

홈즈가 되어 정의를 바로 세우려 분투하다

 

(셜록 홈즈는 시대를 뛰어넘는 아이콘입니다. 불후의 탐정과 파트너 왓슨 박사, 그를 만든 작가 아서 코난 도일. 이들이 보여주는 당시의 영국과 세계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아이콘이 각 국에서 채택되어 130여 년이 지난 후에도 끊임없이 변용됩니다. 이 여행에 동참해 주시겠습니까?)          


20세기 초 잉글랜드 중부의 자그마한 시골 동네. 인도 태생의 성공회 목사가 부지런히 사역 활동을 하고 있지만, 종종 익명의 욕설이 담긴 인종차별적인 편지를 받는다. 그 마을에서 몇 달 간 양과 말 수십 마리를 정교하게 잘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변호사로 일하던 목사의 아들이 체포된다. 그런데 그는 지독한 난시여서 5미터 이상은 거의 보지 못한다. 그런 그가 한밤중에 일어나 철길과 철조망, 울타리를 건너 한 참 떨어진 농장으로 가서 가축을 잇따라 죽인다?      

     


영국의 드레피스 사건’      


이 말도 안되는 부정의를 바로 잡기 위해 아서코난도일(ACD)이 뛰어 들었다. 처 루이제(Louise)가 13년 간의 투병생활 끝에 1906년 사망했다.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던 ACD를 일깨운 것이 조지 에달지(George Edalji) 사건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성을 지녔던 그는 인종차별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범죄자가 되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었다.  


조지는 양과 말 등, 가축을 난도질해 죽였다는 혐의로 1903년 7년형을 선고 받고 3년을 복역 후 1906년 말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석방되었다. 일부 시민들이 그의 무죄를 입증하는 운동을 산발적으로 전개했기 때문이었다.  


조지는 ACD에게 자신의 사건 잡지 기사를 모아 보내고 무죄를 입증하는데 도움을 달라고 요청했다. 코난 도일은 그를 만난 후 사건이 발생한 현장을 가서 증거를 수집했다. 잉글랜드 중부 스태퍼드셔(Staffordshire)에 있는 마을로 찾아갔다. 홈즈가 늘상 그랬듯이. 


런던에서 조지를 만나 본 그는 단번에 그가 난시임을 알아차렸다. 신문을 읽는데 아주 가까이에서도 겨우 보는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찰은 알리바이가 명확한 그를 어떻게 범인으로 몰아갔는가? 법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조지는 인근 대도시 버밍엄에서 근무하면서 일을 잘하는 성실한 청년으로 평판이 좋았다. 


그 지역의 경찰서장은 당시 유행한 인종 범죄학을 근거로 조지를 기소했다. 서장은 이탈리아의 범죄학자 체사레 롬브로스(Cesare Lombroso)의 인종별 범죄인 유형화를 신봉했다. 롬브로스는 19세기 말에 범죄는 유전되며 신체 결함으로 범죄인을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장은 그의 이론에 따라 눈이 튀어나오고 검은 피부의 조지를 범인으로 단정했다. 그리고 상설 법원보다 유죄를 받기 쉬운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계절 법원에 그를 기소해 투옥시켰다. 가축을 대량으로 잘라 죽이는 사건이 장기간에 걸쳐 발생했지만 경찰은 범인을 잡지 못했다. 혹독한 비난에 시달렸던 경찰은 서둘러 그를 기소했다. 재판에서 아들과 아버지가 동성애자라는 근거 없는 중상모략까지 경찰은 서슴지 않았다. 


“시골 잉글랜드의 보수적이며 배타적인 교구에 인도 출신의 목사가 아들과 함께 거주하는 것은 아주 우려할만한 사건을 야기할 상황이었다.”라고 사건 현장을 수사한 ACD는 자서전에 썼다. 그는 사건을 조사한 후 유력한 용의자까지 제시했다. 가축을 절단해 죽이려면 칼을 잘 쓰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게 상식중의 상식이다. 그 마을에서 갱으로 활동하던 푸줏간의 아들을 진범으로 제시하기까지 했다. 


경찰에 공식 재조사를 요구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할수없이 코난 도일은 강력한 무기인 펜을 들었다. 1907년 1월 11일, 1월 12일 일간지 데일리텔리그래프(Daily Telegraph)에 이 사건을 조사한 글을 게재했다. 다른 일간지도 이를 전재할 수 있도록 저작권이 없는 글로 썼다. 셜록 홈즈의 작가가 사건을 수사해 글을 쓰다니. 당연히 독자들이 경찰과 내무부에 아우성을 쳤다. 그리고 ACD의 글을 게재한 일간지는 단번에 불쌍한 조지를 위해 300파운드(2021년 가격으로 23,579 파운드 약 3600만 원 정도, 당시 숙련공의 900일치 임금 정도)를 모금했다.  


“약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는 경찰이 되려 약자를 구속하고 탄압했다니···

잉글랜드 사법에 오점이다. 이 오점을 말끔히 제거해야 한다. 제정신이 있는 판사라면 어떻게 그런 말도 되지 않는 경찰의 증거를 받아들였는지.”


ACD의 펜은 그 어떤 칼날보다 매섭게 경찰과 당국을 후벼 팠다. 그는 이 사건을 잉글랜드 판 ‘드레피스 사건’으로 비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경찰은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펄쩍 뛰며 ACD를 비난하기에 급급했다. 셜록 홈즈를 창조한 작가가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 사건을 수사하고 언론에서 맹공을 퍼부으니 무엇이라도 하는 시늉을 해야 했다. 결국 내무부는 진상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조지를 사면했다. 조지는 겨우 변호사 업무를 재개할 수 있었다. 사면을 받았지만 아무런 배상도 없었다. 경찰이나 내무부의 그 어느 누구도 이 사건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았다.  


유명인이던 ACD는 이후 내무장관이 된 윈스턴 처칠에게도 이 사건의 재조사를 요청했으나 역시 허사였다.       


두 번째 사건오스카 슬레이터는 실패      


머지않아 스코틀랜드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1908년 12월 21일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시에서 부유한 할머니 마리온 길크라이스트(Marion Gilchrist, 당시 83세)가 곤봉에 맞아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경찰은 인근에 거주하던 독일 출신의 유대인 오스카 조지프 슬레이터(Oscar Jospeh Slater, 1872~1948)를 범인으로 기소했다. 살해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 이곳을 방문한 사람이 ‘앤더슨’을 찾았다는 게 경찰이 보유한 유력한 증거였다. 오스카가 이전에 썼던 이름이 ‘앤더슨’이었다. 


그는 살인사건 후 5일이 지나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하지만 영국 경찰이 뉴욕 경찰에 범죄 용의자 인도를 요구하자 무죄를 자신한 그는 자발적으로 귀국했다. 오스카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변호사가 2만 여명의 탄원서를 제출하여 겨우 19년으로 감형을 받았다. 이 유대인은 스코틀랜드의 오지에 소재한 교도소에서 세간의 뇌리에서 까맣게 잊혀진 채 살아갈 운명이었다. 


오스카는 절박한 심정으로 만기 출감하는 동료에게 부탁해 무죄임을 주장하는 자필서를 ACD에게 전달했고 그는 또다시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이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 범죄를 단정했을 뿐만 아니라 범인도 짜 맞추었음을 코난 도일은 확인했다. 오스카는 인근에 거주하던 외국인, 독일인에 유대인. 여기에 더해 노름꾼이어서 유력한 용의자로 찍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도일은 반유대주의와 외국인 혐오에 젖어있던 스코틀랜드 경찰이 증거를 짜 맞추어 아무런 죄가 없는 오스카를 단죄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1912년 여름 오스카 슬레이터 사건(The Case of Oscar Slater)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사건의 사실을 꼼꼼히 따져볼 때 수사와 재판 과정을 매우 불만스럽게 여길 수밖에 없다. 또 불의가 저질러졌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그는 강조했다(일간지 더타임스 1912년 8월 20일자 기사). 이 책은 이년 전 출간된 유사한 책을 좀 더 체계적으로 보강했다. 이 책도 경찰이 상황증거에만 의존했고 외국인이자 유대인인 그를 표적으로 삼았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ACD의 노력도 오스카를 석방하지는 못했다. 오스카가 형기를 다 마칠 즈음인 1927년에 윌리엄 박(William Park)이 오스카 슬레이터의 진실(The Truth about Oscar Slater)을 펴내 그동안 경찰 수사의 문제점을 다시 한번 조목조목 지적했다. 


결국 이런 노력에 힘입어 그는 항소심에서 무죄로 확정되어 1927년 11월 14일에 석방되었다. 19년 억울한 옥살이로 그가 받은 배상금은 6천 파운드(2021년 영국 파운드화 기준으로 25만 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3억 8천만 원 정도)에 불과했다. 오명과 쇠잔해진 건강, 아무리 많은 돈도 이를 보상해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스카는 출소 후 안타깝게도 독일의 친인척을 만나지 못했다. 1933년 정권을 잡은 나치 독일이 그의 두 누이동생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살해했기 때문이다. 


가장 엄정하게 행사되어야 할 공권력이 잘못 사용되었을 때, 이를 시정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그리고 그 어떤 금전적 보상이라도 당사자의 억울함과 한을 풀어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ACD는 이 두 사건을 조사하면서 살해 위협을 받았다. 그 유명한 작가가 이 정도였다면 다른 시민들은 감히 나설 생각도 하지 못했을 터. 


“공무원은 잘못을 지적하면 고치지 않는다. 오히려 조직에 충성해야 한다는 프레임이 공무원들에게 가장 중요하다.”라고 그는 자서전에 썼다.


거의 120 년 전에 먼 나라 영국에서 발생한 일이지만 현재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사진 1 오스카 슬레이터 사건을 다룬 신문 기사, ©안병억)      


참고프랑스의 드레피스 사건      


드레피스 사건은 1894년 프랑스에서 유대인 장교였던 알프레드 드레피스가 독일에게 군사비밀을 넘겼다는 반역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으며 시작됐다. 군 방첩대가 진범을 밝혔으나 군을 이를 무시하고 증거를 조작해 다시 드레피스를 추가 혐의로 기소했다. 당시 유명한 극작가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로 부패한 정부와 반유대주의를 규탄했다. 결국 그는 1906년 석방된 후 사면됐다. 당시 프랑스 언론과 지식인 사회는 드레피스 지지파와 반대파로 양분되었다.      


©안병억. 이 글의 저작권은 저자 안병억에게 있습니다. 무단 복제나 전재를 금지합니다.      



스코틀랜드 문서보관소(The National Archives of Scotland)는 당시 정부 문서와 ACD의 오스카 슬레이터 사건을 비교하여 설명해줍니다. 

https://vimeo.com/268586540      

아서 코난 도일이 출간한 책에 관한 신문기사는 

The Times, "The Case of Oscar Slater," 20 August 1912.     

파운드화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는 정보는 영국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가 제공합니다. 당시 물가와 현재 물가 비교가 가능합니다. 1217년부터 2017년까지 환산이 가능합니다.  

https://www.nationalarchives.gov.uk/currency-converter      

20세기 영국사와 영국사 전반은 저자의 <<하룻밤에 읽는 영국사>>에서 상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룻밤에 읽는 영국사>> 

http://www.yes24.com/Product/Goods/90908294?OzSrank=1      

필자가 제작 운영하는 주간 팟캐스트 안쌤의유로톡 http://www.podbbang.com/ch/12999 

필자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anpye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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