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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Jul 27. 2023

설거지하다가 돌연 춤판 벌이기(Feat. HOT)

뭔가 이상한 음악 얘기

집에 들어오자 나를 반긴 것은 싱크대에 산더미같이 쌓인 그릇이었다. 전에 설거지를 두고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우리말에서 조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낀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 지인들은 설거지를 하루에 한 번‘만’ 하자고 다짐한다 했고, 나는 설거지를 하루에 한 번‘은’ 하자고 다짐하기 때문이다.     


한 번이든 두 번이든 아무튼 설거지를 하기는 한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나는 분연히 두 손에 고무장갑을 끼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아이도 혼자 잘 놀고, 골치 아픈 업무로 인해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터라, 신나는 음악을 듣고 싶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래서 음악을 틀어놓고 설거지를 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듣고 싶었던 노래가 H.O.T.의 <행복>이었으므로 멜론에서 H.O.T.의 2집을 몽땅 플레이리스트에 넣었다.     


오랜만에 들어서 그런지 노래가 하나같이 몹시 신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부르고 있었다. H.O.T. 2집은 내가 겨우 아홉 살이었을 때 나왔지만, 부모님을 졸라 테이프를 샀었기에 모든 곡을 다 알고 있다. 따라부르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1번 트랙인 <Go! HOT>는 멤버들 이름을 다 외쳐줘야 한다. Go 희준, Go 토니, Go 재원, GO 우혁, Go 강타! 순서도 당연히 외우고 있다. 중반에 나오는 찰진 랩도 빼놓을 수 없다.   

  

2번 트랙은 <늑대와 양>이다. 장우혁의 태권도 춤과 문희준의 두건이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바로 그 곡이다. 그리고 대뜸 2000년 6월 28일! 이라는 가사의 랩으로 시작되는데, 어렸을 때 대체 저게 무슨 날이길래 이렇게 비장하게 외치는지 못내 궁금해했던 기억이 난다. 근데 지금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3번 트랙은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이다. 강타의 솔로곡으로 애절하기 그지없다. 이 노래는 역시 알앤비 애드립을 따라해 줘야 한다. 세상 슬픈 표정으로 안녀어어~~~~~~~~엉~~~, 영워워어어어언히이이이이이.... 하고 불러준다. 마지막에는 미간을 있는대로 찡그려줘야 한다.     


4번은 내가 원했던 그 유명한 <행복>이다. 이쯤 되면 흥이 정수리까지 차오른다. 그릇에 퐁퐁을 묻히면서 무릎을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춤판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봤자 나는 어디 내놔도 부끄러울 몸치이기 때문에 남들 보기에 망측할 몸짓일 뿐이지만 상관없다. 너무 삘 받아서 멈출 수가 없다.     


거실에서 아이가 놀다 말고 ‘엄마 왜 저래?’하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그래도 개의치 않는다. 속으로 ‘얘야, 엄마는 아홉 살 때 이미 이 모든 곡을 통달했던 케이팝 영재란다.’라고 말할 뿐이다.

      

행복은 대히트곡인 만큼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랩까지 다 외우고 있다. 한번도 난 너를, 잊어본 적 없어~ , 약속된 시간이 왔어요 그대 앞에 있어요~ 아 너무 신난다. 덩실덩실 둠칫둠칫, 이미 아무도 날 말릴 수 없다.

     

눈 감고 그댈 그려요, 맘속 그댈 찾았죠, 나를 밝혀주는 빛이 보여,  영원한 행복을 놓칠 순 없죠 ~~ 헥헥, 숨이 딸린다. 내 잘못이 아니다. 강타도 라이브할 땐 이 길고 긴 후렴을 한 호흡에 다 부르지 못한다. 토니랑 나눠 부를 때도 있다.     


잠깐만, 얼마나 신났었는지 떠올리느라 순서를 틀렸다. 행복보다 We Are The Future가 먼저다. 그렇다, 또 하나의 명곡이다. 빠른 비트의 화려한 전주를 들으면서 이 부분의 안무가 얼마나 멋졌는지 떠올려본다. 그리고 내가 연습하면 과연 그 춤을 출 수 있을지도 상상해본다.      


나도 춤을 잘 추면 요즘 유튜브에 올라오는 커버 영상처럼 크롭티에 추리닝 입고 야구모자 눌러쓰고 엄청 간지나게 출 수 있을 텐데. 망상이 디폴트인 나지만 이건 정도가 너무 심한 망상이라는 걸 깨닫고 이내 다시 노래에 집중한다.     


아직까지 우린, 어른들의 그늘 아래 있어, 자유롭지 않게. 이런 저런 간섭들로 하룰 지새우니 피곤할 수밖에. 흠. 뭔가 자유주의에 대한 진한 갈망이 느껴진다.     


이런 가사를 부르던 HOT는 그때는 분명 10대를 대변하는 신세대 그 자체였다. 지금은 40대 아이돌 시조새 소리를 듣지만 나와 동년배들한텐 정말 기성세대를 향한 우리의 울분을 대신 표출해주던 존재였던 거다.

     

한번쯤 나도 생각했었지, 내가 어른이 되면 어떤 모습일까.

이 구절을 들으면서 수없이 상상하곤 했다. 내가 어른이 되면 어떤 모습일지. 근데 지금은 그렇게 궁금하던 어른이 되어있다는 게 신기하다. 물론 그렇다고 별반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철없는 덕후로 살고 있으니까.     


그다음엔 6번 트랙 <열등감>이다. 이 노래, 그 시절 아이돌 노래라 하기엔 퀄리티가 좀 높은 것 같다. 특히 강타의 가창력이 제대로 힘을 발휘한다. 이때는 토니와 문희준의 노래 실력이 늘기 전이어서, 거의 강타 원맨쇼다.      


그 애~가~ 처음으로 내게 다가왔을 그때 쯤~ 일 년은 거절당했을 때였어~ 예에. 가사는 되게 안쓰럽다. 듣는 내가 다 ‘마상’이다. 그치만 노래는 열심히 따라 불러줘야 한다. 근데 이런 날벼락이 된 거야아아아~~     


7번 트랙 <12번째 생일>은 이전 곡과 정반대로 아주 발랄하고 상큼한 분위기다. 이 노래ㅋㅋ 어렸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 들어도 참 재미있다.      


내가 어릴 적 우리 엄마 아빤

아주 무서운 분이셨어

내 이름만 불러도 나는 깜짝깜짝

놀랐었으니까     


열두 번째 내 생일은 일요일

하지만 난 너무 슬펐었지

바로 전날 엄청나게 혼나서

열두 번째 내 생일을 우리 엄마아빠가

없애버렸어     


교회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내 발걸음 김빠진 콜라

역시 예측한 대로 우리 집 앞에는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네     


ㅋㅋ 유치하면서도 귀엽지 않은가? 아직 부모님한테 혼날 나이인 10대들에게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이다. 주인공 나이도 겨우 열두 살짜리 어린애라서 동요 같기도 하고, 안됐기도 하고, 여러모로 재밌는 노래다.     


그리고 따라오는 트랙 Tragedy. 또 완전히 딴판으로 어른의 노래다. 다시 한번 생각해줘, 솔직한 너의 마음을 읽고 싶어. 나에게도 기회를 줘, 이대론 너무 억울하잖아. 오랜 친구로만 너를 느껴왔는데 오늘 왠지 몰래 너를 안고 싶어져.      


갑자기 대상 연령이 너무 높아진 거 아닌가? 아홉 살 때 이 노래를 처음 들을 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가사지를 봐도 하나도 이해가 안 됐었다. 서른이 넘고 보니 이제야 너무 잘 이해하겠다. 잃어버린 내 동심이여..

    

대망의 마지막은 <너와 나>이다. HOT의 모든 발라드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명곡이자, SM 역사상 굴지의 팬 송이다. 만약 내가 당시에 CLUB HOT에 가입한 고등학생 언니였다면 이 노래 들으면서 맨날 훌쩍거렸을 것 같다. 그 감성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기에 망정이지.     


네가 세상에 없다면 우리도 없겠지

그 모든 것이 너무 소중해, 오랜 시간

너희가 보내준 마음 읽어가면서

다시 한번 우리 사랑을 알 수 있었어     


이렇게 아름다운 노랫말에 몹시도 감미로운 멜로디지만 이 곡에 얽힌 최대의 기억은 엄마한테 소리가 너무 커서 시끄러우니 볼륨 좀 줄이라고 잔소리 들은 거다. 어째 난 엄마한테 혼난 기억밖에 없는 건지 모르겠다. 킁.     


아무튼 이 노래도 완전 감동적으로 따라불러야 된다. 눈까지 감아가면서 엄청 몰입해서, 함께 하는 노래~~~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나~~ 우리에겐 소중해~~~라고 되도록 아름답게 (그러나 실제로는 그냥 생목으로), 마치 콘서트에서 팬들의 떼창에 감동 받아 눈물 흘리는 HOT를 보듯 부르는 게 포인트다. 그리고 강타처럼 바이브레이션을 할 수 있으면 좀 좋을 것 같긴 하다.     


이렇게 나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이상하게 주위가 조용했다. 둘러보니 아이가 땅콩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게 아닌가. 역시 내 딸답다. 엄마가 그 난리를 치고 있는데 잠이 들다니. 엄마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걸 보고 포기하고 잠든 게 틀림없다. 시끄러움도 불사하고.     


그래서 아이를 안방 잠자리에 옮겨주고 나는 글을 쓰고 있다. 아무래도 언제 노래방에 한번 가야 할 듯싶다. 가서 못다한 음악의 혼을 불살라야겠다. HOT 2집은 필히 다 불러야 한다. 그리고 목이 다 쉬어서 켁켁거리면서 돌아오겠지. 상상만 해도 신난다.      


아,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쌓여있던 설거지는 음악의 힘으로 모두 깨끗이 끝내놓았다. 이제 또 노래 들으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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