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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Apr 23. 2023

부부싸움과 위염을 불러온 보드게임

앞서 발행한 여러 글에서 언급했듯이, 남편은 게임마니아다. 게임이라면 종류와 형태를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나는 자주 그의 상대가 되어주곤 했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즐겼던 것은 바로 보드게임으로, 오늘은 보드게임에 빠진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얘기해보려고 한다.     




우리 부부가 가장 열심히 했던 보드게임은 <아그리콜라>라는 농장 게임이었다. 이는 수년간 전세계 보드게임 인기 순위에서 베스트 3을 벗어난 적이 없을 정도로 아주 유명하고 퀄리티가 높은, 대단히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런데 이 아그리콜라의 플레이 방식은 부루마불이나 호텔왕 게임 등 대중적으로 알려진 가벼운 게임처럼 주사위를 굴려서 말을 옮기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내 말이 행동할 수 있는 횟수가 엄격히 정해져 있고, 그 횟수 안에 어떤 행동을 해야 가장 큰 점수를 얻을 수 있는지 머리가 아프도록 계산해야 하는, 고도의 두뇌 활동을 요하는 게임이다.     


이 어려운 게임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남편을 상대하면서 나는 당연히 수도없이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렇게 많이 지면 하기 싫어질 법도 한데, 이 게임은 어찌나 재미있는지 하면 할수록 승부욕이 불타오르는 것이었다.      


아그리콜라. 가운데에 있는 정리함은 남편이 다이소에서 구입한 것으로, 보드게임 마니아들은 이 정리함을 컴포넌트 정리용으로 사용하고는 한다.



나는 한 번이라도 남편을 이기기 위해 특훈에 들어갔다. 남편 몰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보드게임 커뮤니티에서 공략법을 익혔다. 그렇게 배운 정보를 이용해 나는 드디어 남편과의 대결에서 첫 승을 기록했다. 무려 40번에 달하는 패배 이뤄낸 첫 승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진 것을 분해하기는커녕, 내가 드디어 자신과 대등한 상대가 된 것에 고무되어 더욱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기 시작했다. 내가 잘하게 되니 게임이 훨씬 재미있다는 거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밤 아기가 잠든 후, 우리 부부는 그야말로 치열한 두뇌 싸움을 벌였다.      




두 눈이 벌게지도록 게임에 몰입하던 어느 날, 나는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수세에 몰리고 말았다. 말을 놓자마자 아차, 싶었지만 우리는 이제 상호 간에 물리기란 없기로 약속한 후였다.


내 실수 후 남편이 어디에 말을 놓을지 뻔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아쉬움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런데 그때, 남편이 말을 놓으면서 내 얼굴을 슬쩍 쳐다보는 게 아닌가.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뭐 하는 거지?!!!



남편을 만난 후 그때만큼 그가 얄미워 보였던 적이 없었다. 왜 하필 그는 그 순간에 ‘굳이’ 내 표정을 관찰해야만 했나. 우린 여태까지 두 시간 내내 게임판만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지 않았나. 지금 그 시선은 날 약올리려는, 승리감의 표시 아닌가.


결국 나는 순간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발끈해버렸고, 남편은 그게 아니라며 손을 내저으며 해명했다. 본인은 절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했다.


분명 남편이 더 자세히 그때 내 얼굴을 쳐다본 이유를 설명했었는데, 사실 지금은 그 이유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무진장 화가 났던 것만 기억이 난다. 나중에는 남편도 억울했는지 좀 날이 서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남편의 적극적인 해명으로 나는 그럭저럭 오해를 풀었던 것 같고, 그날은 판을 접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의 승부욕이 너무 과열된 것 같다고, 당분간 게임을 중단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우리 부부의 아그리콜라 대전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승부욕이 강한 성격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나도 지기 싫어하는 면이 있구나.


부부싸움은 금방 끝났지만, 아그리콜라가 내게 남긴 후유증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때는 내가 육아휴직을 하고 있었던 시기라서, 나는 밤에는 열중해서 게임을 하고 낮에는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는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 그래도 잠이 많은 내게 새벽 1, 2시까지 게임을 하는 건 역시 무리여서, 낮에 아기와 놀아줄 때 너무 졸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커피의 힘을 빌려야 했고, 카페인에 유독 약한 체질인 내겐 커피의 효능이 아주 잘 나타나서 간신히 낮에 졸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효능이 지나치게 강했던 나머지, 나는 그만 탈이 나고 말았다. 심한 위염에 걸린 것이다.     


위가 그 정도로 심하게 아픈 건 난생 처음이었다. 아무리 아프고 스트레스를 받아도 식욕이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내가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뱃속에 뭘 집어넣기만 하면 미친 듯이 속이 아파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몇 주 동안 죽과 액체로만 연명해야 했고, 대번에 살이 5킬로나 빠져버렸다. 한 달이 훨씬 지나서야 내 위는 평상시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물론 내 지방층도 빛의 속도로 원래의 두께를 되찾았다는 걸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으리라...





위 사진은 나의 전성기 시절, 엄청난 혈전 끝에 남편을 종이 한 장 차이의 점수차로 이겼던 날의 농장 모습이다. 번듯한 돌집에 드넓은 축사, 풍성한 밭과 작물까지 완벽에 가깝다. 어찌나 뿌듯했던지 이 아름다운 모습을 길이 남기고 싶어 사진을 찍어놓았다. (한동안 카톡 프사 사진으로 해놓기도 했다)   




우리 부부가 보드게임을 하지 않은 지 벌써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내가 복직한 후로는 체력과 시간이 더 모자라서 도무지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남편의 서재 한켠에 고이 모셔둔 저 알록달록 예쁜 일러스트의 보드게임들을 볼 때마다, 언제고 다시 그 재미를 느끼고 싶어진다.     


남편의 꿈은 아이가 더 커서 어린이용 아그리콜라를 셋이 같이 플레이하는 것이다. 그 꿈이 이루어진다면 나 역시 너무나 기쁠 것 같다. 우리 아이도 엄마 아빠를 닮아 승부욕이 강할까? 그 답은 우리 가족의 행복한 나날이 몇 년 더 이어진 후에, 자연스레 알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의 보물인 보드게임 컬렉션. 이렇게 보면 그도 나만큼이나 덕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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