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볼은 격투물로 유명하지만 일종의 소년만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장르로서는 모험적인 시도를 했고, 신기하게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오늘 이야기할 손오반이라는 캐릭터가 바로 그런 사례다.
오공이 애를 낳았다고?
드래곤 볼의 출발점에서 주인공 오공은 열두 살의 어린 소년이었다. 그렇게 오랜 기간(단행본으로 치면 최소 10권)을 작고 귀엽고 순수한 오공에 익숙해져 있던 독자에게, 성인 오공의 등장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거기다 그 오공이 일사천리로 결혼을 하고 자식까지 낳아 데리고 온 것은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정도의 쇼크였다. 작가도 이건 너무 급작스러운 전개라고 생각했는지, 오공의 대사를 빌려 ‘왜, 이상해?’라고 했을 정도다. (응, 많이 이상했어)
아이가 자라고 가정을 이루는 건 당연한 일인데 왜 그렇게 놀랐냐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설정상 오공은 깊은 산속에서 할아버지 손에서 자라고 학교도 다니지 않았기에, 처음엔 여자와 남자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전혀 사회화되지 않은 아이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 정도면 거의 늑대소년이라고 할 만했다. 그런 오공이 아무런 설명도 과정도 없이 덜컥 애 아빠가 됐으니 독자들이 경악할 수밖에. 그렇게 얼떨떨한 반응 속에서 등장한 아이, 즉 오공의 아들이 바로 손오반이다.
오공 vs 오반
오반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 오공은 이미 드래곤 볼이라는 만화의 대체불가결한 주인공으로 확고한 위치를 다진 상태였다. 그러므로 단순히 오공이 다시 어려진 버전에 그치지 않으려면, 오반의 캐릭터는 아버지의 그것과 분명히 차별화되어야 했다.
여기서 작가 토리야마와 편집진은 실로 탁월한 인물 조형 능력을 발휘하여, 그 쉽지 않은 미션을 성공적으로 완수한다. 오반은 오공과는 완전히 다른 매력의 캐릭터가 된 것이다. 다음의 표를 보자.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역시 싸움에 대한 마음가짐이다. 전투민족 사이어인으로서 싸움질이라면 환장하는 오공에 비해, 지구인 혼혈인 오반은 유혈 사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꿈은 열심히 공부해서 학자가 되는 것이며,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마음껏 학문에 몰두할 수 있는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싸움에 동참할 뿐이다.
그러나 유순한 성격과 달리 너무나 강력한 파워 때문에 영유아 시절부터 모든 전투에 다 차출되어야 했고, 그로 인해 겪는 심리적 갈등이 오반이라는 캐릭터의 중요한 특징이자 개성을 이룬다.
오반이 다른 전사들에 비해 가장 두드러지는 점이 또 있으니, 바로 ‘잠재력’이라는 능력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숨겨진 힘, 아직 잠들어있는 힘이 큰 인물로 묘사된다.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보유했다는 사실은 오반이라는 캐릭터에 대단히 높은 위상과 기대감을 부여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센 적이 등장하면 우리 편 전사들은 오반의 잠재력을 끄집어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데, 그게 제대로 먹혀든 것이 바로 오반의 리즈 시절이자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서 제일 멋있는 씬인 셀 전의 각성이다. 그리고 그 전략을 기획하고 밀어붙인 사람은 바로 아버지 오공이다.
초사이어인 2
드래곤 볼에서 초사이어인을 넘어선 단계인 초사이어인 2를 처음으로 달성한 인물이 오반이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아홉 살, 타고난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순간이다.
초사이어인 2가 된 오반은 자신은 물론이고 아버지를 포함한 어른들조차 이기지 못한 셀을 단박에 곤죽이 되도록 패버린다. 이때의 세태 반전은 드래곤 볼에서도 손꼽힐 만큼 드라마틱하다. 그 온순하고 착하던 소년 오반이 분노의 결정체가 되어 천하의 못된 놈인 셀을 가차 없이 응징하는 모습은 통쾌하다 못해 소름이 돋는다.
게다가 초사이어인 2는 파워 뿐 아니라 외양도 대단히 멋있다. 1단계보다 머리카락이 훨씬 더 높이 솟구치고, 온몸을 찌릿찌릿한 전류가 감싸는 모습이 이른바 간지철철이다. 평소의 착한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분노에 찬 강렬한 표정만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때의 오반은 절대적인 주인공인 아버지조차 압도할 만큼 매력적이고 카리스마 넘쳤으며, 세계관 내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오반을 주조연급 정도로 두지 않고 이 정도의 무게감을 부여한 것은, 작가에게 어떤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드래곤 볼을 끝내자’라는 의도 말이다.
죽음으로도 바꾸지 못한 주인공
잘 알려져 있듯 토리야마는 프리더 전을 마지막으로 드래곤 볼을 마무리 짓고 싶어 했다. 그러나 거대한 인기를 자랑하는, 역대 최고의 명작 반열에 드는 작품을 순순히 끝내도록 해주는 출판사는 어디에도 없기 마련이다.
하는 수 없이 작가는 셀 전까지 열심히 그리긴 했지만, 독자들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결말을 내버리고 말았다. 주인공 손오공이 두 번째로 죽은 것이다.
첫 번째 죽었을 때는 드래곤 볼을 모아 용신에게 소원을 빌어서 되살아났지만, 설정 상 용신조차 두 번 죽은 사람은 살리지 못한다. 그래서 손오공은 영영 죽은 것으로 처리되어버렸다. 오공이 워낙 절대적인 주인공이었기에 그를 죽이면 만화를 끝낼 수 있으리라고 토리야마는 생각한 게 아닐까.
또한 그동안 오공이 지켜오던 최강의 자리를 오반에게 넘겨준 것은 시리즈의 종말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런 격투물에서 주인공보다 더 강한 존재가 있다는 건 그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공이 죽는 과정이 워낙 비장미 넘치고 ;; 희생적이었던 바람에, 이런 종말을 향한 시도가 빛이 바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오공이 되살아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셀과 함께 자폭함으로써 또다시 세상을 구한 것이다. 거기다 부활한 셀을 물리치기 위해 오반에게 정신적 힘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죽어서도 존재감을 발휘한다.
한쪽 팔을 못 쓰게 되어 전의를 상실한 오반에게 저승에서도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최후의 에네르기파에 동참하는 오공의 모습은 감동을 자아낸다. 그 순간에 오공과 오반이 대등한 위상의 더블 주인공이었음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명장면이다.
그리고 토리야마는 결국 드래곤 볼을 끝내지 못한다.
왕관은 아버지에게로
(원작 기준으로) 마지막 전투인 마인부우 전에서, 16세의 고등학생으로 성장한 오반은 어린 시절의 영광을 되찾는 데 실패한다. 심지어 이번에는 작가가 ‘죽은 오공을 대신해 주인공은 오반입니다’라고 이례적으로 선언하기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역시 오공의 인기가 너무 높았던 게 이유였다. 두 번 죽은 사람은 살아날 수 없다는 설정을 유지하기 위해 오공은 머리에 죽은 사람을 상징하는 고리를 달고 다니면서까지 출연해야 했다. 그만큼 당시 독자들의 주인공 오공에 대한 욕구는 엄청났다.
거의 태어나자마자 피 터지는 전투를 겪었던 오반은 그러나, 셀 전의 승리 이후 평화에 젖은 나머지(+ 애정전선 형성) 예전의 강함을 회복하지 못한다.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마법(?)으로 잠시 다시 최강자가 되지만 초사이어인 2의 카리스마와 비교할 것은 못 되었고, 어린 천재라는 설정조차 동생들에게 물려주어야 했다. 그렇게 아들은 다시 아버지에게 왕관을 돌려준다.
비록 작가의 전략이 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한때 오공과 오반이 보여준 황금 밸런스는 드래곤 볼이라는 만화의 작품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순수함과 정의로움에 더해 지성과 신중함, 배려심까지 갖춘 오반의 성품은 유일무이한 개성이자 매력이었다. 오공은 성숙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며 철없는 어린이에서 완전한 어른으로 변모하는 데 성공했다. 부자의 상이한 성격은 만화에 풍부한 정서와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그래서 나는 드래곤 볼이 프리더 전에서 끝났어야 했다는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셀 전이 없었다면 오반의 포텐셜 폭발을 목격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건 독자로서 감내하고 싶지 않은 손실이다. 만화는 계속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