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초의 걸크러쉬, 인조인간 18호

by 세온


드래곤 볼에서 손오공을 제외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를 뽑으라고 한다면 그건 바로 인조인간 18호다. 만화를 본 적 없는 분 중 그게 누군지 궁금한 독자님이 계실 듯하여 아래와 같이 사진을 올려본다.

이렇게 생긴 사람이다. 아주 예쁘지 않은가? 예쁜 여자는 여자가 더 좋아한다는 말을 증명하듯 나는 18호의 미모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 세계에서는 극히 보기 드문 차가운 미녀 계열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왼쪽이 18호, 오른쪽은 17호


그런데 몇 년 전 우연히 나무위키를 보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18호의 모델이 된 인물이 바로 유명한 배우 조디 포스터라는 것이었다. 97년작 영화 <콘택트>의 주인공을 맡은 그 조디 포스터 말이다.


그전엔 이름만 들어봤을 뿐 얼굴도 몰랐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그녀가 왜 그렇게 명성이 자자한지 알 수 있었다. 대단히 아름다운데 연기까지 훌륭한 게 아닌가. 게다가 배역도 매력적이고 스토리까지 너무 재미있어서 정신없이 영화에 빠져들었었다. 그런 즐거운 기억 속의 배우였기에 18호가 조디 포스터를 참고삼아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적잖이 반가웠다.


포스터가 그렇듯 18호 또한 얼굴로만 승부하는 캐릭터가 아니다. 내가 특별히 그녀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어지간한 남자 전사들보다도 훨씬 강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베지터 vs 18호


전설적인 18호의 첫 전투씬을 살펴보자. 이때 그녀의 상대가 된 베지터는 초사이어인이 되는 데 성공해 사실상 인간 중에서 가장 최강의 존재였다. (물론 사이어인은 외계인이지만 상대는 인조인간이니..)


베지터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 버리는 그 오만함 때문에 먼저 18호 일행에게 시비를 건다. ‘난 여자라고 봐주지 않는다!’라고 큰소리를 뻥뻥 치면서.


무시하려고 해도 계속 싸움을 거는 데는 성인군자라도 참을 재간이 없다. 본디 손오공을 죽이기 위한 전투 기계로 만들어진 18호는 귀찮아하면서도 은근 즐기는 듯 여유롭게 싸움을 시작한다.


그리고 잠시 후.



18호는 초사이어인 베지터를 아주 가볍게 제압해버린다.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말이다.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의 어마어마한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주 최강의 전사라고 불리웠던 초사이어인을 고작 반 로봇 반 인간인 여자애가 손쉽게 이겨버리다니.


거기다 베지터를 도우려고 출동한 다른 전사들은 물론이고, 또다른 초사이어인인 트랭크스까지도 18호와 17호에게 꼼짝없이 당해버린다. 프리더를 단숨에 해치웠던 트랭크스도 인조인간에겐 상대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 있는지 전율이 일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이 시기의 드래곤 볼의 전개는 독자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이었다. 단순히 강한 놈 다음 더 강한 놈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강한 놈을 가장 강렬하고 극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등장시키는 데 아주 도가 터 있었다. 연출력이 신의 경지에 이른 만화라는 평을 괜히 듣는 게 아니다.


그리고 작가는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시도를 한다. 그렇게 강한 18호를 전사 중에서 제일 전투력이 낮은 크리링과 짝지어준 것이다!



크리링과 18호


지금 생각해도 이 두 사람의 커플링은 상당히 이채롭다. 토리야마 아키라는 너무 오글거려서 로맨스를 그리지 못한다는 인터뷰까지 한 사람이다. 그런데 접점도 없던 두 캐릭터를 굳이 이어주어서 아이까지 낳게 한 이유가 뭘까?


사실 18호가 크리링과 연결되지 않아도 스토리 전개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그런데도 굳이 둘을 커플로 만든 건 드래곤 볼에도 로맨스가 필요하다는 팬들의 의견 때문이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역시 거장은 거장인 것이, 잘 풀어내지도 못한다는 연애 감정도 아주 자연스럽고 애틋하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도록 그려낸 게 아닌가.


적이었던 18호를 파괴할 수 있는 컨트롤러를 손에 쥐고도 스위치를 누르지 못하고, 기껏 불러낸 용신한테 18호의 몸속에 있는 폭탄을 제거해달라는 소원을 빌고, 남자 인조인간인 17호와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바람까지 내보이는 크리링의 마음씨에 어느 누가 감동받지 않겠는가.


크리링의 17호 발언에 갑자기 뛰어나와 외치는 18호의 대사도 기가 막힌다.



이 장면은 결정적인 오역으로도 유명한데, 쌍둥이 ‘남매’를 ‘자매’로 번역해버리는 바람에 90년대에 이 만화를 접한 사람들은 17호와 18호가 모두 여자인 줄 알았던 사건이다. 17호도 머리를 기르고 있어서 나도 당연히 둘은 자매 지간이라고 생각했었다가, 그게 아니란 걸 알고 나서야 18호의 발언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크리링에게 던진 단 세 마디의 말. 그걸로 그 두 사람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어휴, 앙큼해라!



트랭크스, 오천 vs 18호


그로부터 7년 후, 크리링과 함께 살며 한 아이의 엄마가 된 18호는 일종의 직업을 가지게 되는데, 바로 수금..;; 이다.


그녀는 오로지 상금을 벌기 위해 천하제일무술대회에 나가고, 거기서 공교롭게도 남편의 베프의 아들과 한때 본인한테 얻어터졌던 인간의 아들과 맞붙게 된다. 어린아이 두 명과 18호의 대결이 성사된 것이다.



바로 이런 장면에서 작가의 비범한 센스를 엿볼 수 있다. 앞서 했던 커플링 얘기처럼 이 싸움도 스토리 전개에는 전혀 필요 없는 부분이지만, 아주 참신하고 예상치 못한 매치업으로서 독자에게 신선한 재미를 주기 때문이다.


크리링을 통하지 않으면 서로 말 한마디 걸 일 없는 트랭크스・오천과 18호가 무술대회 우승을 놓고 진지하게 겨루다니 참 특이한 맞대결이다. 독자는 자연히 천재 어린이 2명과 18호 중 누가 더 강한지, 누가 이길 것인지 궁금해져서 손에 땀을 쥐고 책장을 넘기게 된다. 정말 대단한 흡입력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느 한쪽의 판정승이었다. 비록 아이들이 주체였을지라도 무척 수준 높은 배틀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18호는 가장 멋있는 캐릭터로 내 뇌리에 오랫동안 남았다. 지금도 때때로 드래곤 볼을 넘겨보다가 그녀가 나오면, 처음 그 장면을 봤을 때 느꼈던 두근거림이 그대로 전해져오는 듯하다. 인조인간 전戰 혹은 셀 전이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데는 18호의 존재감도 분명 한 몫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문득 토리야마가 구상은 해 두었지만 너무 부끄러워서 도저히 그리지 못했다는 크리링과 18호의 연애 스토리가 궁금해진다. 아무래도 공개될 가능성은 없어 보이니 상상으로 메꾸는 수밖에. 하지만 그런 건조함도 18호의 매력이자 만화 드래곤 볼의 매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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