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아직도 이상형이 손오공이니?

by 세온

제목에서 언급한 손오공은 고전소설 서유기의 주인공이 아니다. 세븐틴의 노래도 아니고 날아라 슈퍼보드의 캐릭터도 아니다. 바로 만화 <드래곤 볼>의 손오공이다.

이 아줌마가 갑자기 웬 드래곤 볼 얘기냐며 황당해하실 독자분들의 반응이 그려진다. 그러나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이 만화의 팬이었고, 브런치에 입성한 이후 줄곧 이에 대한 글을 꼭 쓰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드래곤 볼 에세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특이한 인간이긴 하다.


매거진의 첫 글인 이 글에서는 만화에 얽힌 내 추억담을 주로 얘기해보려 한다. 최근 브런치에서 유독 어린 시절의 얘기를 자주 하게 되는데, 십 대 때 나의 덕질이 이미 시작되었고 여태까지도 그때의 영향을 받고 있는 까닭이다.


이발소와 만화책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90년대에는 동네에 이발소가 흔했다. 난 머리를 잘라야 할 때는 엄마를 따라 미용실에 갔고, 이발소엔 아빠와 동생을 따라 놀러 갔다. 이발사 아저씨가 우리 반 친구의 아버지셔서 부모님들끼리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발소에는 기다리는 손님들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잡지와 책이 있었는데, 그중 내가 읽을 만한 건 단 두 가지, <만화 삼국지>와 <드래곤 볼>이었다. 역사 이야기를 좋아했던 내가 삼국지를 꺼내 들자 아빠가 무심결에 이렇게 말했다.

“드래곤 볼이 더 재미있을 거다.”


아마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기억조차 못하실 테지만 그때 아빠는 내게 새로운 취미의 세계를 열어주신 것이었다. 과연 그 만화는 무진장, 엄청나게 재미있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재밌는 책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후로 이발소를 뻔질나게 드나들며 드래곤 볼을 다 빌려보았다. 나중에는 아빠와 동생 없이도 오직 만화를 빌리기 위해 혼자 그곳을 들락거릴 정도였다. 이발사 아저씨는 넙죽 인사하고 냉큼 만화책을 집어가는 나를 보며 그저 허허 웃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여자아이가 이발소를 제집처럼 편하게 드나드는 걸 보고 마냥 귀엽게 봐주셨던 것 같다.


아저씨의 그 인자한 웃음과 손님들의 목에 둘러진 하얀 가운, 색색깔의 둥그런 이발소등, 코를 찌르는 약품 냄새는 여전히 기억 저편에 남아있어 드래곤 볼을 볼 때면 함께 아련히 떠오르곤 한다.

또 하나의 보물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본격적인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그때 오래전 저학년 때 보았던 드래곤 볼을 우연히 다시 읽게 되었고, 감수성이 일찍 발달했던 나는 그길로 바로 본격적인 팬의 길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만화책 중 35권은 특별히 아끼는 이야기여서, 빌려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책을 사고야 말았는데 그때의 추억이 각별하다. 매일 학교를 마친 후 동네의 '학사서점'(지금은 없어진 지 오래다)에 달려가서 만화책이 도착했는지 묻곤 했다. 작은 서점이어서 책을 주문해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사장님은 매일 찾아오는 나를 귀찮아하지도 않고 웃으며 응대해주셨다.

“이걸 어쩌나, 학생. 아직 안 왔는데. 좀더 기다려야 할 것 같어.”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상냥하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긴 기다림 끝에 35권을 손에 넣었을 때, 빌린 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 책의 질감에 감격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그것을 벅찬 가슴에 안고 집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책장에 꽂았다가, 마음을 바꿔 내 보물상자에 넣었다. <작은 아씨들> 리뷰에서 언급한 적 있는 그 분홍색 상자 말이다.


그런 후 집요하게 부모님을 졸라 만화책 전권(요즘엔‘구판’이라고 불리는 42권짜리 전집)까지 사들이는 데 성공했다. 내가 드래곤 볼 책 전체의 소유자가 되었던 그날의 설렘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동네 서점 앞에 우리 집의 첫 차였던 은색 아반떼(흔히 구아방이라고도 한다)를 세우고 노끈으로 묶은 만화책 수십 권을 묵묵히 트렁크에 싣던 아빠의 모습도, 그것들을 방 책장에 고이 진열해놓고 행복해했던 어린 나도.


동생과 엄마


그러나 그렇게 기쁘게 사들였던 드래곤 볼 전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난을 겪게 되었으니, 다름 아닌 가족들로 인해서였다.


나와 동생은 어느 정도 철이 들기 전까지 아주 맹렬하게 싸우곤 했는데, 그날은 내가 동생에게 아주 심한 분노를 심어주며 판정승을 거둔 날이었던 것 같다. 폭발하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던 동생은 누나가 가장 아끼는 드래곤 볼 35권에 손을 대는 것으로 복수를 결행했다.


나는 동생의 두고 보라는 엄포에 잔뜩 겁을 먹었지만, 그 아이가 한 짓이라곤 책장을 조금 찢어놓는 정도가 다였다. 그걸 보니 차라리 마음이 놓였다. 마음 약한 동생은 누나의 보물에 차마 그 이상의 위해는 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보다 훨씬 더 강한 공격은 엄마로부터 비롯되었다. 내가 학교에서 친 시험에서 아주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100점 만점에 20점인가 30점인가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가 생각해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인 점수였다. 왜 그렇게 못 쳤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그야말로 극도로 분노해서, 나의 소중한 만화책들을 마구잡이로 책장에서 끄집어내더니 창문을 통해 베란다로 던져버렸다.

“이런 걸 사줘봤자 다 무슨 소용이야!”


그런 엄마와 속절없이 날아가 처박히는 만화책들을 바라보며 나는 두려움과 절망에 엉엉 울었다. 너무나 서러웠다. 시험을 망친 건 맞지만 그게 이 정도로 혼날 만큼 잘못한 일인가. 어린 마음에 깊은 상처가 남았다.

그날 엄마가 정말로 내 만화책들을 다 없애버린 줄 알았지만 사실 그렇진 않았다. 아마 엄마도 비싼 돈 들여 산 것을 버리기엔 너무 아까웠을 것이다. 42권을 전부 사는 데 10만원이 넘게 들었으니 당시 물가를 감안하면 상당히 큰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어느샌가 나의 만화책은 슬그머니 내 방 책장에 돌아와 있었다.


어떻게 만화 속 인물을 좋아할 수 있니


제목에서 쓴 대로 내 첫 이상형은 손오공이었다. 학교에서도 만화 얘기를 워낙 많이 했기에 친구들은 내가 그런 줄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중학교에 입학한 후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나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넌 아직도 이상형이 손오공이니?”


아마 그때쯤엔 바뀌었던 것도 같다. 아마도 백스트리트 보이즈의 닉 카터가 그 다음이었던 듯한데, 그는 그래도 실존하는 사람이기라도 하지 손오공은 만화 속 인물이라는 데서 나의 비범함이 드러난다. 친구들은 어떻게 만화 캐릭터를 좋아할 수 있냐며 놀려대곤 했다.


물론 내가 손오공을 정말로 깊이 사모했던 건 아니었고 친구들 웃으라고 던진 말이긴 했지만, 드래곤 볼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손오공이었던 건 사실이다. 이상하게도 인터넷에서는 그가 악덕 아빠고 베지터가 좋은 아빠라는 의견이 많아지면서 인기가 없는 편이던데, 나는 오공의 팬으로서 그것이 근거 없는 주장이라는 것을 나중에 증명할 예정이다.


(드래곤 볼 에세이 두 번째에서 계속됩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