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합니다.
분량 조절에 실패했어요. 원래는 추리소설에 관심 없는 분들도 쉽게 읽을 수 있게 쓰고 싶었는데, 쓰다 보니 손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이지 뭐예요? 결국 꽤 길고 전문적인 이야기를 하고 말았어요.
그래도 별 네 개, 강력 추천하는 책입니다. 범인 찾기 좋아하고 추리나 스릴러 장르를 즐기신다면 후회하지 않으실 거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따끈따끈한 신간이랍니다..^^
역시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프롤로그
아시아에서 OOOkm 떨어진 남아메리카 대륙 한쪽 구석, 베네수엘라와 브라질 사이에 존재하는 작은 나라 가이아나 공화국. 그 안에 의문의 마을이 존재하니, 바로 ‘조든타운’ 이다. 조든타운에서 가이아나의 수도 조지타운까지는 무려 240km나 되는 밀림이 차지하고 있는 상황. 이 오지 중의 오지에서 불가사의한 살인사건이 연속으로 발생한다.
어느 사이비 교단의 교주가 900명에 달하는 신자들을 데리고 ‘조든타운’을 개척했다. 그곳을 조사하고자 파견된 조사단은 총 네 명, 거기에 탐정인 오토야까지 합류한다.
과연 그들은 조든타운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의 범인을 밝혀낼 수 있을까? 교주의 감시를 피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리고...
900명의 신자들을 사이비 종교의 마수에서 구해낼 수 있을까?
'본격' 추리장르에 빠져보자
본격 추리소설, 다른 말로 고전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기대해도 좋다. <명탐정의 제물>은 수수께끼(트릭) 풀이를 주제로 하는 전형적인 본격 추리물이다.
이런 경우 본격물을 이루는 구성요소를 얼마나 정교하고 참신하게 녹아냈느냐가 작품의 완성도를 평가하는 척도가 된다.
나는 다년간의 추리소설 탐독으로 단련한 높은 덕후력으로, 본격물에 주어지는 과제를 이 작품에서 잘 해결했는지 조목조목 따져보고자 한다.
밀실 트릭
고전파 미스터리의 꽃은 뭐니뭐니해도 역시 밀실 트릭이다. <명탐정의 제물>에서도 밀실 트릭이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는데, 비교적 잘 알려진 전통적인 트릭과 보지도 듣지도 못한 창의적인 트릭이 모두 등장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후자의 참신함은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기대해도 좋다.
다만 진범을 밝히려면 꼭 풀어야 할 결정적인 트릭이 약간은 억지스럽다는 점이 아쉽다. 좋게 말하면 독자의 허를 찌르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일종의 말장난 같다. 소설 전체가 이 지점을 위한 길고 긴 빌드업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클로즈드 써클
클로즈드 써클이란 소설 속에서 다수의 인물이 특정한 장소에 모였을 때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그 장소가 어떤 이유 – 지리적, 자연적, 물리적 여건을 모두 포함한다 – 로 인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어, 내부의 모든 인물이 용의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을 일컫는다. 그 유명한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이 유형에 해당된다.
클로즈드 써클은 등장인물 사이에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불신감을 조성하며, 최후의 2~3인이 남을 때까지 인물들이 하나하나 살해당하므로 독자에게 극도의 스릴을 선사한다.
<명탐정의 제물>은 용의자를 소수로 한정시키기는 어렵지만 주 무대인 조든타운이 수백 킬로미터의 밀림에 둘러싸인 열대 오지이므로, 클로즈드 써클에 어느 정도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탐정 일행이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오직 운송기뿐인 상황에서 사이비 교주는 그들의 탑승을 금지한다. 이런 설정은 주요 인물을 사실상 살인이 벌어진 장소에 갇히게 만듦으로써 높은 긴장감을 조성한다.
논리적 추리
본격파에 속하는 작품도 탐정의 추리 방식은 다 조금씩 다른데, <명탐정의 제물>은 그중 논리에 기반한 추리 방식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이 작품을 결정적으로 다른 소설과 차별화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바로 ‘신앙인의 추리’와 ‘외부인의 추리’가 별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같은 살인사건을 종교적 망상에 물든 신자의 시선을 통해 본 신앙인의 추리와, 그 종교를 믿지 않는 일반인의 입장에서 해석한 외부인의 추리라는 두 가지 버전으로 설명하다니.
이는 종교에 대한 광적인 믿음이라는 주제와도 연결되면서 논리적 추론의 쾌감까지 놓치지 않은, 작품의 가장 뛰어난 성과다.
반전(범인의 의외성)
최근 출간되는 추리소설을 읽어보면 충격적인 반전은 기본이고, 반전의 반전의 반전까지 다중 반전이 등장하는 작품도 흔하다. 주로 일본의 신진 작가들이 선보이는 소설이 이런 기술적인 성취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작품들이 많은데, <명탐정의 제물>도 그중 하나다.
범인을 전혀 예상할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다. 반전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분명 만족할 것이다.
독자와의 대결
이 항목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소설을 읽고 나면 독자는 마치 사기당한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독자와의 공정한 대결이란 범인을 추리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소설 속에 공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결정적인 단서가 어떠한 암시로도, 복선으로도 언급되지 않은 채 결말까지 갔는데, 탐정의 입으로 사실은 숨겨진 사건이 있었다거나 어떤 인물은 진짜 정체를 감추고 있었다는 폭로가 나온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독자만 바보된 느낌이 들지 않겠는가. ‘사실은 그랬다’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거면 뭐하러 이 긴 소설이 필요한지 의문도 들 것이고 말이다.
<명탐정의 제물>은 그런 점에서 정정당당한 작품이다. 진상이 다 밝혀진 후에 앞서 읽은 내용을 돌이켜보면, 작가가 독자에게 중요한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사실은 두세 번씩 반복해서 언급되기도 한다. 그래도 범인을 못 맞춰서 문제지..
그래도 이 정도면 작가가 ‘이런 게 어딨어!’라며 항의하는 독자의 화난 얼굴을 상상하며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상당히 주도면밀한 서술을 보여준다.
굳이 아쉬운 점을 찾자면
앞서 살펴본 내용으로 <명탐정의 제물>이 손색없이 우수한 본격 추리소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반대로 단점으로 꼽을 만한 부분은 무엇이 있을까?
장르 특성상 스포일러 없이 단점을 말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포괄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쉽지만 몇 가지 정리해보겠다.
극적인 효과를 위한 과장이 지나친 면이 있다.
최후의 범행 동기에 설득력이 충분하지 않다. 즉, 조금 억지스럽다.
메인 빌런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혹은 알 수 있지만 선인지 악인지 정체성이 모호하다.
완벽한 트릭 외에는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전체적인 완성도에는 영향을 주지 않으며, 작품을 재미있게 읽는 데 전혀 지장이 없음을 확실히 해두고 싶다.
기적은 존재하는가?
기적의 유무는 종교와 믿음을 주제로 한 이 소설에서 중요한 쟁점이다. 추리소설도 철학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추리적 요소와 별개로 문학적인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한 측면이기도 하다.
결국 추리소설도 문학작품인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인간의 보편적인 고뇌를 제시한 것은 훌륭한 선택이라고 본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들게 되는 인물들의 개인사도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데, 그들 대부분이 사회에서 소외된 장애인이나 유색인종, 빈곤층이다.
우리처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현대인이었던 그들이 종교에 의탁하여 과대망상 환자가 된 것은 과연 그들 개인의 잘못일까?
독자는 각자 어떤 답변을 할까. 작가는 이 작품이 단순한 킬링타임용 소설이 아님을 무거운 질문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일본 소설에 등장한 한국 청년
마지막으로 꼭 언급하고 싶은 이색적인 특징이 있다. 바로 작품의 주요 인물로 한국인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름은 ‘이하준’으로, 운동권 출신이다.
이하준은 한 성당의 성폭행 사건을 폭로했다가 전기고문을 당한 캐릭터로, 소설 자체가 70년대를 배경으로 했다고는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이 잘 드러났다는 점이 신기하다.
다른 나라 소설에서 우리나라 인물이 중요하게 다뤄질 때마다 그들의 시선으로 본 한국인이 궁금해서 흥미가 동하곤 하는데 이하준도 그런 사례라서 반갑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하준이 어떻게 되는지는.....
책에서 직접 확인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