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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Sep 04. 2023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프린세스 메이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바흐가 작곡한 음악이고, <프린세스 메이커>는 컴퓨터용 게임이다.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가지가 왜 나란히 제목으로 쓰인 걸까? 그건 나의 독특한(사실은 좀 희한한) 취향 때문이다.


    

 더위가 한껏 위용을 뽐내던 5년 전 7월의 어느 날, 만삭의 나는 출산휴가를 맞아 종일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즈음엔 임신 후기 증상인 전신의 심한 가려움 때문에 잠을 잘 자지 못하고 새벽 일찍 깨어나곤 했는데, 그날도 그랬다. 나는 세상모르고 정신없이 자는 남편을 부러워하며 혼자 거실로 나왔다.

    

 작은 상을 펴서 노트북을 놓고, 책상다리로 앉았다. 스팀(게임을 구동하는 프로그램)에 로그인했다. 내가 유일하게 즐기는 게임인 프린세스 메이커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프린세스 메이커는 가상의 딸을 공주로 키우는 게임이다.

      

 시키고 싶은 교육과 아르바이트를 선택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체력, 매력, 기품, 도덕성 등의 수치가 올라가고 내려간다. 예쁜 드레스를 돌아가면서 입혀줄 수도 있고 간단한 대화도 할 수 있으며 친구나 남자친구도 만들어줄 수 있는 아주 아기자기한 게임이다.

      

 대개 기본 BGM을 그대로 틀어놓고 플레이하곤 했으나 그날은 달랐다. 새벽이 아주 고요했기 때문이다. 몹시 조용하고 평화롭고 잔잔했다. 그 고즈넉함과 어울리는 품위 있는 음악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고른 것이 바흐의 곡이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얘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음악과 혼연일체가 된 듯한 연주를 선보인 피아니스트가 있다. 글렌 굴드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추천 음반은 어느 책을 봐도, 누가 가르쳐주어도 굴드의 것을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얼른 소장하고 있던 81년도 녹음을 가져다 오디오에 넣었다.

     

 그런데 굴드의 음반이 유명한 이유는 연주뿐만이 아니다. 그는 연주할 때 아주 독특한 습관이 있었으니, 선율을 허밍으로 따라부르는 것이었다. 마이크를 바로 앞에 두고 말이다.

    

 당연히 피아노 소리와 굴드의 목소리가 함께 녹음되었고, 음향 엔지니어들은 후자를 지우고 전자만 깨끗하게 남기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 결과 미리 이 사실을 알고 일부러 귀 기울이지 않는 이상 굴드의 목소리를 포착하기 어려울 정도의 음반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완벽하게 지우진 못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주의 깊게 들으면 허밍이 분명히 들린다.

     

 다시 7월의 그날로 돌아가 보자. 나는 굴드님의 허밍과 영롱한 피아노 소리를 감상하며 민첩하게 마우스와 키보드를 움직였다. 아무도 깨지 않은 얌전한 새벽, 나지막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는 햇빛. 그 속에서 즐기는 우아한 음악과 신나는 오락.
      

 그때 나는 가슴이 아플 정도의 행복을 느꼈다. 온통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나의 가장 소박하지만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이었다. 잠시 마우스를 쥔 손을 풀고 눈을 감고 음악을 음미해보았다. 완전한 황홀경이었다. 그 순간 시간은 오로지, 온전히 내 것이었고 그곳은 천국의 한가운데였다.

     

 그런데 환상에서 깨어나 다시 공주 키우기에 돌입한 내게 게임의 최대 고비가 찾아왔다. 해피엔딩을 보기 위해 꼭 무찔러야 할 최종 보스가 도저히 쓰러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럴 리가 없다며 세이브 파일을 불러와 가상의 딸에게 무술과 검도를 집중 연마시켰다. 정신력과 공격력을 만렙으로 만들고 땡빚을 내서 무시무시하게 비싼 무기를 사주었다. 그리고 호기롭게 최종 보스에게 다시 도전했지만, 여전히 패배였다.

     

 오기가 생긴 나는 스탯을 이리저리 바꾸고 갑옷과 무기도 갈아치우며 몇 번이고 같은 적에게 덤벼들었다. 그 와중에 오디오에서는 지적이고 차분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계속 흘러나왔다. 이기지 못할 싸움을 하는 나를 비웃듯 선율은 한 치도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않았다. 조금의 동요도 없이, 감정의 파고 없이 도도히 나아가고 있었다.    

  

 그걸 듣고 문득, 나는 보스 해치우기를 단념했다. 게임이 뭐라고 나의 마음을 이렇게 멋대로 쥐고 흔든단 말인가. 음악은 이토록 이지적인데 나는 왜 그렇지 못한가.  

   

 스스로를 다독이며 흥분을 가라앉히고 노트북을 정리하려는데,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굴드였다. 그의 허밍이 마침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잔뜩 심취한 목소리였다. 아주 나른하고 여유로웠다. 마치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구불구불 피어오르는 듯한 노래였다.

     

 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랬다. 바흐 앞에서는 대 피아니스트조차 한 명의 팬일 뿐이었다. 거장의 체면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흥에 겨워 노래하는 굴드, 그가 콘서트에서 떼창하는 팬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좋아하는 일에 진심이라는 건 그나 나나 같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그 순간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범접할 수 없는 신적인 존재 같던 거장이 조금은 친근하게 느껴졌다.

    

 굴드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내 웃음도 커졌다. 얼마나 좋았으면 녹음되는 것도 괘념치 않고 저렇게 따라 불렀을까. 그 마음이 40년 가까운 세월과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거리까지도 넘어서 전해지는 것만 같아,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그날의 새벽은 내가 출산 전 마지막으로 누린 자유였다. 몇 주 후 태어난 (진짜) 딸아이로 인해 삶의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육아가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던 때,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프린세스 메이커의 기억은 차라리 괴로울 정도로 그리운 존재였다. 그만큼 너무나 절실하게 그때의 자유를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진짜 딸이 꽤 자랐으니, 가짜 딸 육성하는 재미를 다시 느껴도 되지 않을까? 5년 전 넘지 못한 보스의 벽에 재도전하는 것이다.

     

 그때처럼 바흐를 들으면서 플레이해도 괜찮을 것 같다. 굴드의 느슨한 허밍과 변화무쌍한 주제, 이지적인 음표의 배열을 다시 감상하는 거다.


 그렇게 조금씩, 밀려났던 자유가 돌아와 엄마의 자리를 나눠가질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그래서 진짜 딸을 키우는 일이 내 개인의 행복을 침범하는 것이 아님을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그날의 기억을 이렇게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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