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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Dec 21. 2023

신화와 SES, 그리고 후배들의 T.O.P.

신화는 1집부터 빵 터진 그룹이 아니었다. 데뷔곡인 해결사와 후속곡 으쌰으쌰가 큰 반향을 얻지 못하면서, 이미 H.O.T.나 젝스키스, NRG 등의 선배들이 차지하고 있던 남자아이돌 팬덤의 파이를 그들이 나눠먹을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그런 신화에게 처음으로 길을 열어준 곡이 2집 타이틀곡 T.O.P. 였다.

     

 유명한 클래식인 백조의 호수의 선율을 메인 테마로 삼고 그 위에 유영진 특유의 알앤비 감성을 얹은 T.O.P.는 발표와 동시에 큰 인기를 모았다. 여기에 백조의 움직임을 형상화한 독특한 안무와 올 화이트 정장이라는 세련된 의상의 힘까지 더해지며, 신화는 단숨에 인기 아이돌의 반열에 올랐다.

     


 나 역시 그들을 좋아하긴 했으나 T.O.P.라는 노래가 썩 취향은 아니었다. 후렴에 백조의 호수를 샘플링한 방식이 너무 평면적이고 일차원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유영진의 창작 멜로디인 신혜성의 브릿지가 더 좋았다.

     

 그런데 최근 이 노래를 찬찬히 다시 들어보니 의외로 매력적인 구석이 많았다. 특히 예전엔 주목하지 않았던 도입부와 중반부의 랩이 꽤 좋은 것이었다. SM은 랩이 약하다고만 생각했던 터라 의외였다.

     

 랩 메이킹을 유영진이 하지 않았다면 전문 래퍼에게 맡겼을 텐데, 누가 만들었든 백조의 호수 선율과 무척 잘 어울리는 플로우다. 너무 정확하거나 깔끔하지 않고 웅얼거리듯 낮게 깔리는 톤도 이 곡의 인상을 결정짓는다.

     

 음악과 무대에 있어 키플레이어를 한 명 꼽는다면 단연 이민우다. 그는 도입부 랩이 끝나자마자 강렬하게 치고 나오는 My Love is DRC~ 파트를 맡아 탁월하게 소화함으로써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민우의 그 외침 하나가 이 곡 전체에 카리스마를 부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팀에서 제일 가는 댄서로서 군무를 이끌 때의 존재감도 두말할 나위없이 엄청나다. 후렴에서 백조의 안무를 선보일 때, 그 춤을 그보다 더 잘 살리는 사람은 팀 멤버와 아이돌 후배를 통틀어 보지 못했다. 특히 센터에 서서 양 팔을 오른쪽으로 들어올릴 때 어깨와 턱의 독특한 위치는 오직 이민우만 보여준 것으로, 저 안무가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있는 이유이다.


 참, 이 곡의 무대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가 하나 더 있다. 노래가 끝나기 직전 빰빰빰빰! 하는 사운드에 맞춰 신!화!창!조! 라고 외치는 팬클럽의 응원법이다. 어찌나 딱딱 맞는지 음원을 듣다 저 네 음절이 없어 허전함을 느낄 정도다.


 99년도의 히트곡 얘기를 갑자기 왜 하는가 하면, 최근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드디어 SES의 일본 앨범을 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저작권 문제로 막혀있던 명곡들을 다시 고음질로 들을 수 있다니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 중에는 T.O.P.도 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SES는 일본 활동을 위해 이 노래를 리메이크해 발매했다. 그러니까 일회성 커버가 아닌 정식 리메이크다.

     

 유튜브에는 SES 버전의 T.O.P. 뮤직비디오도 있지만 딱히 별로 볼 건 없다. 당시 윗분들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인지 SES는 노래만 부를 뿐 안무라고는 제 자리에 서서 리듬 타는 정도밖에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음악은 물론 들을 가치가 있다. 당연히 바다 덕분이다. 바다는 거의 이 노래를 지배한 수준이다. 그녀가 말아주는 유영진 스타일의 멜로디 라인을 듣기 위해서라도 SES 버전의 T.O.P.는 가치가 충분하다.

     

 랩은 M-Flo 라고 하는 일본의 힙합 그룹 멤버인 Verbal가 맡았는데, 이 분은 재일교포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SES 뿐 아니라 보아, 동방신기 등 SM 후배들과 휘성, 2NE1 같은 가수들과도 종종 협업했다.

     

 전문 래퍼가 담당했으니 당연히 기술적인 면에서는 신화의 것보다 M-Flo의 랩이 더 낫겠지만, 가사와 플로우가 다 바뀐 데다(아마 래퍼 본인이 다시 썼을 것이다) 톤이 크게 달라진 점은 조금 아쉽다. 난 신화 원곡에서 에릭이 들려준 터프한 톤의 랩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SES 버전의 T.O.P.를 듣고서 다시 신화의 노래를 들으니, 예전엔 무심코 넘어갔던 음원의 특정 부분이 확성기를 댄 것처럼 확 살아나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로 코러스다.

     

 후렴을 잘 들어보면, 겹겹이 쌓인 남자들의 보컬 뒤로 작고 가느다랗게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있다. 그 주인공이 바다다. 바다가 소속사 후배인 신화의 노래에 코러스로 참여한 것이다.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내게 앨범 크레딧이 있진 않다. 그러나 2n년째 SES의 팬으로써 나는 저 목소리가 바다의 것이라는 데 내 노트북 정도는 걸 수 있다. 독자분들도 한 번 잘 들어보시라.



 

 SES와 신화는 음악 외적으로도 매우 친했다. 2000년대 초반,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토크쇼인 서세원 쇼에 두 그룹이 함께 출연한 적이 있었다. 난 우연한 기회에 그 회차를 시청했었는데, 얼마나 심하게 웃었는지 배가 찢어지는 줄 알았다. 두 팀이 서슴없이 쏟아내는 과감한 디스와 드립의 향연에 정신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신화야 원래 그렇다 치고 난 SES 언니들이 그렇게 재밌는 사람들인 줄 전혀 몰랐다.

     

 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떠오르는 주제가 하나 있다. SM에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보이그룹과 걸그룹 간의 남매를 방불케 하는 친분 관계이다. 말 나온 김에 1세대부터 정리해보자.

      

S.E.S.  - 신화
보아 –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 소녀시대
(이 구도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소녀시대는 샤이니와도 친하기 때문이다. 난 2세대 아이돌의 전성기에 덕질을 하지 않았으므로 이 시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샤이니 – F(x)
레드벨벳 – 엔시티

     

 가장 최근에 데뷔한 에스파와 라이즈는 유독 선배들과의 접점이 없어 보여, 연습생 기간이 거의 겹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남매 그룹은 각종 비하인드 영상이나 SM 전체 콘서트 때 친분을 과시하며 많은 팬들에게 웃음을 주곤 하는데, 친목이 훈훈해서 미소 짓거나, 서로를 향한 디스가 너무 적나라해서 박장대소하거나 둘 중 하나다.

     

 예를 들면 슈퍼주니어가 대기실에 있던 소녀시대에게 다가가 김희철이 어떤 사람인지 네 글자로 표현해달라고 했더니, 유리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미.친.사.람.’이라고 한다거나...


 말 나온 김에2로, T.O.P.를 커버한 후배 아이돌들의 무대를 한 번 찾아봤다. 의외로 SM 후배 남자아이돌은 이 노래를 부른 적이 별로 없고, 소녀시대와 방탄소년단, 에이티즈 세 그룹의 무대가 특기할 만하다.

    

 신인 시절의 소녀시대가 선보인 T.O.P.는 뭐랄까, 그룹의 색깔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무대 같다. 소시는 분명 노래든 춤이든 다 뛰어난 그룹인데도 불구하고 T.O.P.를 걸그룹이 부르고 추니까 상당히 무미건조해 보이는 게 아닌가. 왠지 이 곡의 퍼포먼스만큼은 보이그룹에 특화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화 멤버들의 터프하고 마초스러운 이미지 때문인 듯하다.

    

 방탄소년단의 T.O.P.는 군무가 제일 만족스러운 무대다. 이 곡의 안무는 여섯 명 대형일 때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데 방탄은 마침 한 명이 더 많을 뿐이라 잘 어울린다. 특유의 각잡힌 칼군무가 돋보임은 물론이다.

    

 처음에 RM이 랩을 하며 등장할 땐 몰랐는데 정국이 센터로 튀어나왔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신인 시절이라고는 하나 너무 애기 아닌가. 실제로도 고작 16~17세밖에 안 된 나이였지만, 저 시절 정국을 본 게 처음인 나는 그 앳된 정도에 몹시 놀랐다. 그러나 정국은 예나 지금이나 황금 막내다. 보컬과 춤 둘 다 훌륭하게 리드한다.

  

 마지막으로 에이티즈. 두 멤버의 카랑카랑한 랩이 이목을 잡아끈다. 신화와 전혀 다른 스타일의 랩은 우리는 에이티즈이고, 선배님의 노래를 우리 것으로 소화해 부를 겁니다, 라는 메시지를 확연히 전달한다. 약간의 락적인 요소가 가미된 편곡도 좋다. 아쉬운 점은 인원이 많아 군무에 응집력이 덜하다는 것. 그러나 자기들 색깔을 잘 살린 커버라고 본다.



     

덧대는 말 1

     

 T.O.P. 의 가사에 제목처럼 세 자의 알파벳 줄임말이 많이 나와서 그 뜻이 궁금해 찾아보았다. 옛날엔 궁금해하지도 않고 그냥 들었으니 이제서야 비판적 사고력이 좀 키워진 것인가.

     

 DRC : Dangerous, Risky, Chaos     

 MIL : Millennium, Innocent, Love     

 DOP : Delight of Passion     

 DOG : Delight of Gorgeousness

     

 그럴 듯한 문구도 있긴 한데 대체로 좀 오글거린다. 세기 말 감성이렷다.


덧대는 말 2

     

 백조의 호수를 샘플링한 이 가요를 떠올린 이유는 또 있다. 내가 애정해 마지 않는 시리즈 <난처한 클래식>의 여덟 번째 권, 차이코프스키 편이 드디어 나왔기 때문이다. 바로 주문해서 받았다. 헤헷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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